영국은 입헌군주제가 주는 상징성에서 뿐만 아니라 실제 생활에서도 다양한 전통이 많이 유지되고 있는 나라이다. 일상 생활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전통 중 하나가 펍(pub)이라는 선술집이다. 펍에서는 맥주 등 주류는 물론,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푸짐한 전통 저녁식사를 즐길 수 있어, 영국 서민들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있다. 억지로 비유하자면 우리나라의 예전 '주막'과 같은 곳이다. 실제로 지금도 많은 영국 펍이 여관을 겸하고 있다.
그런데, 영국의 전통과 문화를 반영하는 이 펍의 수가 대폭 줄어들고 있다고 현지 언론들이 보도하고 있다. 2014년 말 발간된 관련 보고서는 1960년대 말 약 7만5000개에 달했던 펍이 2013년에 약 4만8000개로 감소했다고 전한다. 20여년 전 유학시절, 금요일 저녁이면 자리가 없을 정도로 붐볐던 영국 학교 정문의 펍이 지금은 한산하다고 느끼는 개인적 경험도 언론보도와 통계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영국 사람들에게 펍은 동네 술집 이상의 공간이다. 한국에서 상상하는 펍은 대개 축구팬이나 럭비팬들이 맥주를 마시며 자기 팀을 신나게 응원하는 모습일 게다. 실제로 펍은 일과를 마친 사람들이 간단하게 맥주를 한잔하며 오락을 즐기는 곳이다. 그러나 펍은 그 이상의, 이를테면 지역공동체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집에서 저녁 식사를 마친 노부부가 맥주 한 잔을 두고 이웃 사람들과 즐겁게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펍의 또 다른 단면이다. 때로는 동네일을 기탄없이 토론하는 민주주의의 거점이 되기도 한다. 펍은 작은 공연장 역할도 겸하니, 지역이나 마을 단위에서 행하는 크고 작은 행사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각종 정치며 철학 강연이 행해지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어떤 이는 펍을 '영국의 심장'으로까지 치켜세웠다.
과거 공산주의 주창자인 칼 마르크스가 펍에서 맥주를 즐겼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가 아니다. 영국으로 망명한 마르크스가, 지금도 유흥가로 유명한 런던 북부지역 소호 거리의 여러 펍을 전전했다는 숨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친구들과 함께한 그는 소호 거리의 무려 열여덟 군데 펍을 배회했다고 한다. 마르크스에게서 진정한 술꾼의 모습이 엿보인다. 그의 '공산당 선언'은 펍에서 주로 노동자들에게 행한 강연을 묶어 출판한 것이며, 그의 '자본론'은 대영도서관뿐만 아니라 펍에서도 집필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마르크스가 공산주의를 "8시간 노동 후에 저녁을 먹고 펍에서 맥주를 마시면서 철학과 인생을 논하는 것"으로 간단하게 요약했다니 그의 펍 사랑을 알만하다. 물론 펍과 관련한 비유에서 그의 치열했던 당시 고뇌도 더불어 짐작된다. 마르크스가 펍에서 자본주의의 모순을 고민했다지만, 지금은 펍이 그가 몰락을 예언했던 자본주의의 확장에 도리어 몰락하는 신세가 되고 있다.
펍의 쇠퇴에 많은 이유가 붙는다. 펍이 옛 스타일을 고수하고 있으니 젊은이들 사이에 인기가 없다는 진단이 나온다. 이른바 '아재 스타일'에 대한 경원은 한국이나 영국이나 비슷한 모양이다. 펍에서 맥주를 마시기보다는 세련된 바에서 와인을 즐기는 것이 소비지향의 시대에 더 멋있는 모습으로 비추어지는 모양이다. 또 다른 원인은 상대적으로 비싼 펍의 맥줏값이 지적된다. 맥주 1잔(1 파인트)에 우리 돈으로 5000원 정도 된다. 이 가격이면, 치열한 경쟁을 하는 대형 마트에서 맥주 서너 캔을 살 수 있으니, 집에서 술을 즐기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단다.
어떤 이들은 영국 부동산 개발 광풍과도 연결시킨다. 펍들은 비교적 좋은 위치에 있어, 구매 후 상가니 플랫(연립주택)으로 개조하여 되팔면 많은 이익을 남길 수 있으니 목 좋은 곳에 있는 펍들이 남아나질 않는다고 한다. 술과 음식 판매에 붙는 영국의 비싼 세금도 한 몫을 했다는 분석도 있다.
그렇게 나이가 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나의 이해가 맞닿아 있는 곳도 아니지만, 펍의 몰락에 새삼 서글퍼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옛것은 가고 늘 새로운 것들이 들어서지만, 펍의 쇠퇴를 보면서 재차 신자유주의의 광풍에 자리를 내주는 여러 가지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게 된다. 거대 다국적 유통기업들의 경쟁, 부동산 개발을 통한 파편화된 개별 이익의 극대화, 소비를 위해 소비되는 소비세계가 전혀 꿈적하지도 않을 것으로 보였던 '영국의 심장'을 역사의 뒷길로 내몰고 있다.
펍에서 사회주의적 이상을 고민했던 마르크스가 만약에 지금 펍의 몰락을 본다면 뭐라고 할지 자못 궁금해진다.
부산외대 외교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