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의 왼쪽 뿔 위에 있는 촉(觸)나라와 오른쪽 뿔 위의 만(蠻)나라가 싸웠다. 영토 분쟁으로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촉과 만으로서는 나라의 명운이 걸린 일전이다. 한데, 사람의 눈으로 보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싸움이다. 전국시대 위의 혜왕이 제 위왕의 약속 위반에 노해 전쟁을 벼뤘다. 신하들의 의견이 분분해 현자인 대진인에게 물으니 이렇게 대답했다.

이건, 어리석은 싸움이다. 달팽이의 뿔 하나를 차지한들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이미 싸움의 한계는 자명하다. 그래도 진흙탕에서 발을 빼지 못하면 영광은 더욱 멀어진다. 상황이 변했는데 생각을 바꾸지 않는 건 고루한 것이고, 옛날 방식만 고집하는 건 딱딱하게 굳어가는 것이다. 부드러움은 성장의 싹이고 딱딱함은 기울어짐의 표식이다.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린가 하면, 박근혜정부의 전쟁을 말함이다. 지난 3년을 한번 둘러보라. 시작은 인사참극이었다. 김용준, 문창극, 안대희, 이완구, 윤창중, 윤진숙…. 그 다음은 공약의 폐기였다. 경제민주화, 반값 등록금, 고교 무상교육, 기초연금…. 처절한 정쟁이 뒤를 이었다. 국정원 댓글사건, NLL논쟁과 정상회담 대화록 유출, 사초 실종, 전두환 과징금 추징과 채동욱 검찰총장 중도사퇴,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과 통진당 해산, 성원종 리스트, 정윤회와 문고리 권력, 국회법 파동과 유승민 낙마, 개성공단 폐쇄, 당 내분과 파행적 공천…. 세월호와 메르스 사태, 원전·자원·방위산업 비리, 사드와 AIIB, 담뱃세 주세 소득세 등 서민 증세….

한마디로 전쟁 같은 나날이었다. 치열한 내부의 전쟁을 벌였지만 대한민국이 얻은 건 무엇인가. 재정 적자와 가계 부채와 기업 부실화? 청년 실업난과 노동개혁 논란? 고독사, 패륜범죄, 영·유아학대? 누리과정 예산 떠넘기기? 아무리 뜯어 보아도 나라에 보탬이 되는 건 찾기 힘들다. 얻는 것 없이 잃은 것만 남았다면 이거야말로 달팽이 뿔 위의 전쟁과 무엇이 다를까 싶다.

4·13총선의 참패는 이런 과정의 결과다. 결과가 허망했다면 이제라도 방법을 바꾸는 게 순리다. 나라에 이득이 없고 국민들이 싫어하는 싸움을 해서 무엇에 쓸 것인가. 얻어 봐야 달팽이 뿔 하나고, 잃으면 전부를 잃을 수도 있는 싸움을 반복할 수는 없다. 과거의 성공에 도취해 낡은 방식을 되풀이한 것도 패배의 원인이다. '신념과 원칙을 재검증하고 무원칙을 원칙으로 삼아라.'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성공은 없다는 말이다.

총선 패배 뒤 대통령의 말은 조금 걱정이 앞선다. '민심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겠다. 20대 국회와 긴밀히 협력하겠다.' 그게 다였다. 성난 민심에 대한 자기 반성은 없었고, 사과는 꼬리도 보이지 않았다. '비난받기 전에 결코 사과하지 말라'는 말도 있지만 이미 과실이 드러난 바에야 솔직히 인정함만 못하다. '수술이 무섭다고 안 하면 죽을 수도 있다.' 맞는 말이긴 한데 기존 노선을 고수해서는 평화가 오긴 힘들다. '내 갈 길 간다'고 해서 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왕이면 반대 방향으로 가 보면 어떨까. 우선은 야당 이야기를 듣고, 여당과도 대화해 합의 가능한 일부터 시작하면 된다. 개헌? 그것도 좋다. 기형적인 5년 단임제를 4년 중임제로 바꾸고 부통령제도 만들어 경제 분야를 아예 떠맡기는 것도 괜찮다. 경제의 구조개혁? 그것도 좋다. 대기업, 수출 일변도의 구조를 중소기업, 벤처기업 육성과 내수 진작으로 바꾸자. 그렇게 말이다.

부자 감세도 철회하고 4대 개혁도 야당안을 보완해 추진하면 된다. 한계산업을 구조조정하되 해고대란에 대한 보완책을 강구한다. 살얼음 경제에 충격을 가하지 않도록 노력하면 될 것이 아닌가. 전체 산업의 경쟁력 강화라는 큰 그림을 그리고 그 속에서 구조조정이 이뤄져야 그나마 안정을 찾을 수 있다.

지금 필요한 건 어제의 일을 잊는 게 아니다. 어제와 전혀 다른 오늘로 화답하는 게 순리다. 어차피 여소야대 정국이다. 과거의 방식대로는 어떠한 일도 하지 못한다. 의지도 좋고, 사명도 좋지만 국민이 호응해야 성공하는 법이다.

사람이 우둔한 것이 아니다. 방법이 잘못됐기 때문이다. 성심이 모자람이 아니다. 고집이 앞을 가리기 때문이다. 보는 눈이 달라지면 세상이 달라 보인다. 땅바닥밖에 보지 못하는 뱀의 눈이 아니라 창공을 나는 독수리의 눈이 필요한 시점이다. 지금 당장보다는 먼 미래를 보는 안목이 필요하다. 내일이 뭔데, 그렇게 묻는 하루살이로는 답이 없다. 내년이 뭔데, 하고 의아해하는 매미의 관점으로는 역사를 굴리지 못한다.

성공하려면 다 바꿔야 한다. 조직도, 방법도, 생각도…. 적어도 그렇게 하면 책임의 무게라도 줄일 수 있다. 실패를 뚫고 일어서려면 밀알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 과거의 내가 죽어야 미래의 우리가 산다. 이미 낡아버린 대한민국, 그 틀을 바꿔야 우리가 산다.

논설고문 aiwi@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