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들른 그곳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한낮인데도 수많은 청년예술가와 관광객이 북적거렸다. 수백 년간 서민의 장례와 납골당으로 쓰인 곳이었다니 더욱 새로웠다. 이 지역은 파리의 전형적인 도심 낙후지인 19구역 내 오베르 빌리 104번지에 있다. 장례식장이 문을 닫고 오랫동안 방치된 이곳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1500여억 원을 투입해 2008년 개관한 이곳은 이제 파리지앵들의 새로운 문화예술 창작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19세기 풍 철조 건물을 일부는 살리고 리노베이션하여 매력적인 문화예술공간으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미술 음악 소설 건축 무용 등 모든 분야의 세계 예술가들이 모여서 새로운 문화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었다. 창작활동과 레지던스 기능을 겸비했으니, 파리의 높은 생활비와 임대료에 시달리던 아티스트들에게는 오아시스와 같은 공간이다.
예술가들만의 폐쇄공간이 아니다. 지역 주민과 함께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눈에 띈다. 지역 주민이 참여하는 벼룩시장이 정기적으로 열린다. 지난해에는 그 안의 어린이집을 하루 동안만 어른들을 위한 공간으로 개방했다. 도도하고 시크한 파리지앵들이 천진난만하게 뒹굴고 노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이처럼 예술가들이 난해한 자기만의 예술세계에 갇히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대중영합적인 삼류예술이 아닌, 파리의 '살아 있는 예술(art-vivant)'을 즐길 수 있는 열린 문화공간이 되었다. 이전에는 저녁에 다니기 겁나는 지역이 문화와 예술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동네로 완전히 변신했다. 104를 불어로 생 캬트로라고 하는데, 바로 '생 캬트로 파리'가 이곳의 정식 명칭이다.
부산에서는 영도대교를 건너면 오른쪽에 기름때 묻은 창고가 즐비한 독특한 마을이 있다. 1934년 영도대교를 건설하면서 지금과 같은 버선 모양의 매립지가 만들어졌다. 6·25전쟁으로 피란민들이 이곳으로 밀려들어 왔다. 그 이후 대화재로 600여 세대 이재민이 발생하는 등 부산의 대표적인 취약마을 가운데 하나였다. 한때 조선·선박 경기가 좋을 때는 크고 작은 수리조선소의 일감을 받아서 호황기를 누리기도 했다. 선박을 수리할 때 배에 붙은 조개나 녹을 망치로 두들겨 떼어내야 페인트칠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온종일 '깡깡'하는 망치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이름 붙여진 일명 깡깡이 마을이다. 1200세대 2800여 명이 거주하는 영도구 대평동 1·2가 일원이다.
그러나 지난 10여 년간 남항이 쇠퇴하고 조선수리시설이 이전하면서 쇠락 일로에 있다. 거주인구는 지난 30년 사이 절반이나 줄었고, 노인인구만 25%를 넘는다. 70%가 넘는 낡은 건물에 공폐가가 50개가 넘는 등 매우 힘든 이 마을에 새로운 도전이 시작됐다. 지역에서 진지하게 활동하는 문화예술기획단체가 이 마을에 필이 꽂혔다. 예술가들을 위한 예술점방, 예술공작소, 필드뮤지엄 등 조선수리소와 빈 창고들의 현장성을 그대로 살린 예술 프로젝트를 의욕적으로 준비 중이다. 나아가 주민들이 편리하게 사용할 커뮤니티센터, 도시민박촌 등 예술가와 주민들의 협력공간도 들어설 계획이다. 입주할 예술가들과 주민들이 공동으로 작업하고 활동하는 문화사랑방, 물양장 살롱 프로그램 등 협력사업들도 눈에 띈다. 부산시가 공모하여 추진하는 예술상상마을 프로젝트의 구상들이다.
왜 낡은 공업지역이나 취약마을을 다시 살리는 재생 사업에 문화예술이 필요한가? 이 질문에 대한 이해와 합의점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예술적 접근은 주민들이 편안하게 접근할 수 있다. 복잡하고 날카로운 이해관계가 아닌 새롭고 재미있는 예술과 문화 프로그램으로 주민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예술적 접근은 주민들끼리 연대심을 높인다. 대부분 재개발 사업장에서 나타나는 주민들 간의 갈등과는 달리, 예술적 접근은 주민들의 화합과 결속을 낳는다. 이른바 문화를 통한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의 창출이다. 그리고 예술적 접근은 주민들이 구경꾼이 아니라 주체로 만든다. 한때는 어려운 예술 작품이나 행위들로 주민들을 주눅이 들게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최근 공공예술은 주민들이 작가들의 도움을 받아 예술활동의 중심이 된다.
이 모든 것이 다 좋아도 돈이 안되면 필요 없다는 반론도 드세다. 그러나 예술적 접근은 궁극적으로 경제적이다. 재개발해서 고층 아파트를 짓는 만큼은 돈이 안될 수도 있다. 그러나 고층 아파트 개발 이익이 과연 주민들에게 돌아가는지는 의문이다. 이에 비해 예술적 접근은 주민 골고루에게 돈이 된다. 문화와 예술이 있는 마을 브랜드는 엄청난 무형의 가치다. 동네 브랜드가 높아지면 그 지역과 주변 부동산 가치가 두루두루 올라간다.
취약마을에는 공통적인 어려움이 있다. 주민들은 오랫동안 살아왔기 때문에 좀 불편한 게 있어도 참고 그럭저럭 살아가지만, 정작 잘 모르는 주변인들의 마을에 대한 안 좋은 평판 때문에 자존심 상하고 힘들어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문화와 예술이 마을에 접목되면 주민으로서 자부심이 높아진다. 좀 없이 살아도 이웃끼리 마을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며 살아가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 우리 서민의 삶이지 않은가?
낡고 폐허가 된 장례식장을 파리가 자랑하는 멋진 문화예술공간으로 재탄생시킨 '생 캬트로 파리'와 앞으로 만들어질 '깡깡이 예술상상마을'은 지역 특성이나 예산 규모가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문화와 예술적 접근을 통해 취약한 마을을 변모시키려는 바람은 맞닿아 있다. 삐딱한 모자에 수염 기른 몇몇 작가의 폐쇄공간이 아니라, 주민들과 부산 시민이 자랑스러워하는 예술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하려면 모든 이해관계자의 진정성이 필요하다.
진정성은 세상을 감동시킨다. 혹시 아는가? 부산에서 피아노를 배운 '건반 위의 구도자' 세계적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라흐마니노프 소나타 1번 공연을 깡깡이 마을 소규모 공연장에서 볼 수 있을지? 부산을 예술혼의 샘이라고 항상 자랑하는 세계적 거장 이우환의 작품을 바닷가 창고미술관에서 볼 수 있을지?
부산발전연구원 부산학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