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이중섭은 평남 평원 사람이다. 그런데 제주도에 이중섭 기념관과 거리가 있고 부산에도 있다. 통영에는 이중섭 공방들이 있다. 서울은 그가 살았던 집을, 대구는 그가 즐겨 찾던 다방과 동네를 기념하고 싶어한다. 왜 이렇게 이중섭에 매달릴까. 어느 누구와도 비견될 수 없는 그의 탁월한 작품성이 첫 번째 이유다. 하지만 그를 기념하는 곳 어디에도 이중섭의 진품은 없다. 몇 년동안 아니 고작 6개월 정도 머물렀던 곳이 그의 도시가 될 수 있는 것은 드라마틱했던 그의 삶 이야기가 작품 속에 고스란히 녹아있기 때문이다. 조금은 특별하면서도 가난했던 소시민의 인생이 담긴 그의 작품 속에서 대중은 지난 시간에 대한 강렬한 동질감과 한국인으로서의 진한 향수를 공유하는 것이다.

이중섭 마케팅! 비판론도 있지만, 이 때문에 많은 사람이 그의 작품세계에 더욱 더 깊게 빠져들고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논지의 핵심은 '그 사람'과 연결된 이야기가 지역 활성화와 도시 마케팅의 테마가 되고 수단이 되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점이다. 관광과 상업 효과는 따라오는 것이지 목적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만 지킬 수 있다면 '그 사람'을 찾고 또 기억하는 일은 널리 권장되어야 한다. 그런데 '단지 그 사람' 때문에 해당 도시나 지역을 찾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이순신(통영 남해 등) 류성룡(하회) 윤선도(보길도) 윤이상(통영) 노무현(김해) 정도이지 않을까 싶다.

인물과 도시가 함께 살아 움직이려면 강력한 필연의 이유가 있어야 한다. 우연이나 강제로 될 수 있는 일이 절대 아니다. 그 사람과 그 도시 간의 관계가 매우 뚜렷하고 밀접해야 한다. 고향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 그 사람 인생 최대 하이라이트의 장소를 보유했거나 그 사람의 일상이나 작품 속에서 그곳에 대한 염원이나 애틋함이 강하게 스며있어야 한다.

이런 시각에서 부산을 바라본다. 안용복 장영실 송상현 정발 윤흥신 지석영 박기종 안희제 박재혁 최천택 한형석 박차정 김원봉 윤상은 우장춘 윤봉길 이봉창 이승만 금수현 김종식 유치환 이중섭 황순원 김중업 장기려 최성묵 김정한 강석진 김영삼 노무현 최민식 최동원 이태석 등. 시각에 따라 평가가 엇갈리고 또 타지인도 있지만, 대한민국의 역사와 부산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친 인물들이다. 문화예술은 물론 애국, 독립운동, 복지, 교육, 경제, 정치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든다.

이들 외에 '드러나지 않는 부산의 그 사람들'은 더 많다. 수많은 항일과 구국운동에 참여했던 민중들, 6·25전쟁으로 부산 사람이 된 피란민들, UN기념공원에 잠들어 있는 2300여 명 군인, 1950~80년대 국가 경제기반을 쌓았던 부산항과 동천변의 산업 역군들, 부마항쟁과 6월항쟁을 이룬 시민들, 자갈치·국제·부평·부산진시장 상인들…. 두드러지진 않았지만, 지역 변천사에 획을 긋고 지난 140여 년 고비 때마다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했던 부산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등장은 개항도시, 항구도시, 피란도시, 국가재건도시로 이어졌던 부산 근대사의 필연적 결과였다. 이들은 부산이 융합을 모토로 한 국제교류도시로 나아갈 수 있는 초석을 제공했고, 이들이 지나온 여정은 언젠가부터 부산 정체성의 한부분이 되었다. 8월이 되면 특별히 그 사람들이 떠오르고 그리워진다. 이름이 있건 없건 간에 그들의 공통점은 나라 사랑, 희생과 봉사, 특별한 용기, 그리고 삶에 대한 각별한 애착이었다. 세상 물욕과는 거리를 둔 따뜻함과 깊은 성찰이 앞섰던 소중한 부산 사람들이었다.

지금 우리는 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을까. 단순히 동상이나 기념관으로 뭉뚱그려 그 사람들에 대한 기억을 강요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 좁은 역사관이나 몰인식으로 마음대로 그들을 정죄하거나 방치하기도 한다. 시대가 흐르면서 그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장르 또한 급속하게 다양해지고 있는데도 우리가 가진 대안은 늘 똑같다. 뭘 만들어 세우거나 관련 터나 자리에 이름 붙이기가 고작이다. 정답이 없기에 뭔지 모를 아쉬움과 답답함은 점점 커져만 간다.

그들의 긍정적인 영향력을 부산의 힘과 에너지로 승화하는 부산만의 특별한 판단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사실 그동안 부산시에서는 '부산학'의 범주 속에서 그들의 여러 가지 이야기에 관한 연구와 출판을 해왔다. 하지만 결과물들이 시민의 피부에 와 닿지 않고 겉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부산학의 진정한 가치는 시민과 함께 호흡하며 시민 스스로가 지역 사랑을 체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의미가 생기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부산을 있게 한 그 사람들을 부산학의 중심에 세워보자. 초등학생에서부터 성인에 이르는 시민 모두가 그 사람들을 제대로 기억하고 객관적인 시각 속에서 그들에 집중할 수 있는 혁신적인 교육시스템을 짜보자. 어쩌면 이 일이 문화융성과 청년창업의 과제를 풀어가는 부산만의 창의적인 역발상이 될지 모른다. 아니 분명 과제 해결의 실마리(key)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 시대는 달랐지만, 그 사람들이 꿈꾸었고 소중하게 생각했던 '그 뭔가'에 대한 학습과 이해, 공감만이 지역에 기반을 둔 시민 삶 변화의 진정한 출발점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최근 피란수도를 세계유산에 등재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피란 1세대의 소멸과 피란 시대의 다양한 흔적들이 급속히 사라져 가는 현시점에서 부산시가 매우 의미 있는 선택을 했다. 특히, 피란 극복 과정에 발생했던 그 사람들의 역할을 재조명하는 일은 물질 유산의 배경이 되는 비물질 가치를 최고의 것으로 판단하는 유네스코 정신에 크게 부합하는 일이다. 다만 세계유산의 등재만이 달성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 일은 시민 모두가 부산을 더 사랑하고 그 사람들을 존중할 수 있는 실질적인 계기가 되어야 하고, 또 부산 스타일의 도시관리 철학과 방법을 찾아가는 특별한 과정이 되어야 한다. 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세계유산으로 여기는 도시, 그 도시는 진정 이 시대가 추구하는 최고의 모델 도시가 될 자격을 가진 것이다.

경성대 도시공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