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경택 감독의 영화 '극비수사'가 화제다. 영화는 1978년 부산에서 일어난 유괴사건을 담았다. 감독은 영화 곳곳에서 당시 부산의 모습을 보여준다. 청소년이 내뿜는 열기로 가득하던 구덕운동장 앞 거리. 전국에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극장이 밀집해 '영화관의 은하수'로 불리던 남포동 극장가.

돌이켜 보면, 이때가 부산의 황금기였다. 부산이 인구 300만 명이 넘는 대도시로 자라난 것도 이때였다. 그만큼 일자리를 찾아온 사람이 많았다는 말이다. 그때만 해도 부산엔 큰 기업이 많았다. 부산은 한국 원양어업의 전초기지였고, 동명목재나 국제상사처럼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이 있었다. 그뿐이 아니다.

■부산의 황금기

1978년 5월, 부산 지역 신문의 자매지로 태어난 대중문화 전문 주간지가 있었다. 유명한 영화배우와 TV 탤런트가 앞다퉈 표지 모델로 나섰다. 이 잡지의 표지 모델로 선정된다는 것은 유명 배우로 인정받는다는 말이기도 했다. 전국적 명성을 떨치며, 서울에도 보급한 이 주간지는 한때 최고의 판매 부수를 자랑하던 '선데이서울'을 제치고 36만 부를 판매한 적도 있었다. '주간국제' 이야기다.

대체 '주간지 전성시대'로 불릴 만큼 잡지가 쏟아진 시대에 '주간국제'가 인기를 끈 이유는 뭘까. 김사겸 영화감독의 회상을 들어보면, 대중매체 특성에 맞춘 '영화 콘텐츠'도 큰 몫을 한 것 같다. 유현목 감독의 조연출을 거쳐 시나리오 창작, 평론, 연출을 종횡무진 넘나들던 김사겸 감독이 서울 생활을 접고 부산에 온 건 1977년.

그를 잡지에 영입해 영화 콘텐츠를 강화한 것은 당시 국제신문 최화수 기자였다. 이처럼 주간지에 영화계 '마당발'을 맞아들인 덕분에 영화 평론과 같은 교양 콘텐츠도 풍성해지고, 영화계 소식도 서울 충무로보다 먼저 전할 수 있었다. 그뿐 아니다. 1978년 7월, '주간국제'는 김사겸 감독의 영화계 네트워크와 힘을 합해 '전국 신인 남녀배우 선발대회'를 열었다.

전국에서 1000명이 넘는 지원자가 몰렸다. 유현목 감독을 심사위원장으로 모시고, 배우 장미희가 명예심사위원으로 참여한 가운데 4단계 심사를 거쳐 남자 12명, 여자 16명을 선발했다. 다음 해 열린 선발대회에는 무려 1600명이 넘는 지망생이 몰렸다. 정윤희, 이영옥, 원미경, 김추련과 같은 톱스타가 명예심사위원으로 나섰다.

■'주간국제'의 창의성

지방에서 열린 행사가 이처럼 성공한 것은 획기적 기획 때문이었다. 선발된 사람은 김사겸 감독이 운영하는 '영화교실'에서 두 달 정도의 배우 수업을 받고 정인엽, 홍파, 김호선, 하길종과 같은 스타 감독의 작품에 출연할 수 있었다. 또 쟁쟁한 제작사들이 영화 제작을 보장했다. 그러니 어떻게 사람이 몰리지 않겠나.

첫해에 선발된 배우 조상구(본명 최재현)는 한국 영화의 전설인 '병태와 영자'(하길종 감독·1979)에서 조연을 맡았다. 또 둘째 해에 뽑힌 엄보상은 예명을 김병태로 바꿔 '병태만세'(김수형 감독·1980)의 주연을 맡았다. 말하자면 최인호 소설가의 '병태 삼부작' 가운데 두 편이 '주간국제'와 함께 영화로 만들어진 셈이다.

하지만 선발대회는 아쉽게도 2회로 끝났다. 1980년 7월, 정부가 '주간국제'를 비롯한 전국의 172개 정기간행물을 무더기로 강제 폐간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불의의 참사였다.

곧이어 정부는 전국 4대 일간지로 인정받던 국제신문마저 폐간시켰다. 이것은 단지 지역 언론사의 비극일 뿐 아니라, 한국 영화계의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주간국제'의 시도는 값진 것이었다. 대중매체가 그야말로 대중적이고 재밌는 형식 속에서 영화 평론, 문제작 소개, 영화계 소식과 같은 고급 콘텐츠를 제공하는 한편, 영화제작사와 감독과 배우를 연결하는 영화 제작 생태계를 만들어냈으니까 말이다. 이것은 현재 영화도시 전략이란 관점에서 봐도 멋진 일이 아닐까.

■응답하라 1978

어떤 사람은 부산국제영화제가 태어나기 전 부산은 영화의 불모지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건 부산의 역사를 모르는 말이다. 영화의 생산(제작) 매개(평론) 향유(관객) 가운데 부산의 약점은 생산이었다. 매개와 향유는 뒤처지지 않았다. 허창 평론가를 비롯한 7명이 국내 최초로 영화평론가협회(1958)를 결성했고, 장갑상 부산대 교수가 한국 최초의 영화 평론·이론서인 '영화와 비평'(1970)을 펴낸 걸 봐도 알 수 있다.

이런 가운데 '주간국제'는 어떤 언론도, 어떤 평론가 집단도 생각지 못한 일에 성공했다. 서울 제작사와 전국의 인재를 끌어들여 부산의 약점인 생산 부문을 보완한 거다. 문자 매체가 영화의 생산 매개 향유를 하나로 묶는 고리가 된 것이다. 정말 한국 영화의 새로운 기틀을 다지는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주간국제'가 폐간되지 않았다면, 한국 영화계와 부산의 역할은 달라졌을 거다. 부산이 제2, 제3의 하길종 감독과 함께 한국 영화사를 새로 썼을지도 모른다. 달리 말해 부산영화제가 성공한 것도, 부산 시민이 영화제를 뜨겁게 지지한 것도 역사적 토대가 있었기 때문이고, 그 토대를 만든 요인 가운데 하나는 '주간국제'였다는 말이다.

예술은 예술인이 다 만드는 것 같지만, 사실 예술인은 사회가 만든다. '주간국제'는 정부 지원도 없이 영화 예술인을 만드는 사회 환경을 마련했으나, 오히려 정부의 손에 무너졌다. 안타깝지만 역사는 이미 일어난 일이기에, 바꿀 수는 없다. 다만 현재의 노력으로 미래를 바꾸는 일은 가능할 거다.

1978년 무렵과는 달리 한국도, 부산도 다변화됐다. 영화계도 마찬가지다. '순수예술'로서의 영화가 지닌 역할은 공적 보호를 받고 있으며, '대중예술'으로서의 사회적 영향과 산업적 의미는 날로 커지고 있다. 민·관·정·재계가 머리를 맞대야 하는 이유다. 여기서 국제신문이 큰 역할을 해주기 바란다. 21세기에 걸맞은 지혜를 발휘해, 다시 한 번 영화의 생산 매개 향유를 엮는 중간 고리가 돼주길 바란다.

철학박사·필로아트랩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