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는 '바이러스 행성'이라 할 만하다. 사람도 게놈(유전체) 기준으로 보면 인체와 바이러스의 연합체라 하겠다. 유전자의 10% 정도가 바이러스이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체의 공통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던 학자들은 유전자 탄생 이전에 바이러스가 존재했다는 가설을 내세우기도 했다. 혹여 그렇다면 바이러스는 인류의 조상일지도 모른다.

인류가 오늘날까지 진화해온 데는 바이러스의 도움을 무시할 수 없다. 바이러스와의 치열한 전쟁을 통해 생존에 필요한 저항력을 키워왔기 때문이다. 바이러스라는 명칭은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뱀의 독'과 '남성의 정자'. 그러니까 죽음과 탄생의 양면성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이는 바이러스가 인간을 숙주로 삼아 공격하는 한편으로 공존하고 있음을 뜻한다.

자연 세계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역사에도 행위의 법칙이 작용하기에 양면성이 존재한다. 산업혁명을 보자. 인류 발전의 획기적 전기가 된 산업혁명이지만, 공장의 비인간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일대 사건이기도 했다.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악마의 맷돌'이라 혹평한다. 자연과 인간, 사회를 모조리 갈아서 상품으로 전락시켰다는 것이다. 런던올림픽 개막식에서도 산업혁명은 경이로움과 괴로움으로 나뉘어 표현됐다.

동해냐, 일본해냐를 두고 벌어지고 있는 한일 양국의 다툼 역시 역사의 명암을 잘 드러낸 예다. 한민족에게 있어 동해는 생명의 바다이다. 삼국시대부터 시작해 조선조까지 동해, 창해, 동대해 등으로 불렸다. 그런데 일제의 국권 침탈과 식민 지배로 인해 일본해로 둔갑해 버렸다. 국제무대에서 일본해가 통용된 게 어언 86년째다. 동해의 역사적 정통성과 당위성을 빼앗긴 채.

메이지시대 일본 산업유산이 우여곡절 끝에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한국의 반발이 거세자 일본 측이 조선인 강제노역 사실을 시인함으로써 이뤄진 결과다. 세계유산위원회는 탁월한 외교의 승리라며 타협의 정신을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애당초 일본은 산업시설 등재시기를 1850~1910년으로 한정해 강제징용시기를 아예 빼버렸다. 역사의 그늘은 외면하고 빛만 강조하고자 한 일본의 꼼수를 물고 늘어지지 않았다면 어찌됐을까 . 일본 산업유산의 세계유산 등재는 역설적으로 그늘의 역사를 도려내지 않고 후세에 물려주게 됐다는 점에서 반길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