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지난해 11월 말쯤의 일일 것이다. 황우여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부산을 방문했다가 물벼락을 맞았다. 물벼락은 물벼락인데 사연이 좀 재미가 있다. 황 장관은 당시 강서구에 있는 프리드리히 알렉산더대학교(FAU) 부산캠퍼스를 방문했다. 실험실에 들어서면서 천장에 달린 손잡이를 잡아당겨 온몸이 흠뻑 젖었다.
세 장의 사진이 이날 긴급 타전됐다. 물벼락 맞은 순간과 그 뒤 환하게 웃는 사진이었다. 실험실에 설치된 샤워기는 화학약품이 묻었을 때 긴급하게 씻어내는 용도라고 한다. 물벼락 맞은 황 장관은 웃으면서 "내가 처음으로 이 시설을 테스트해줬다"고 조크를 했다.
황 장관의 물벼락 사건은 국제신문이 일부 원인을 제공했다. 그날은 황 장관의 국제신문 정치아카데미 강의가 예정돼 있었다. 이왕 내려온 김에 겸사겸사해서 경제자유구역에 있는 독일 대학 분교를 찾은 것이다. 이유야 어쨌든 정치인 황우여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이날 식사 시간 때 물어봤다. 사진이 잘 나왔던데 어떻게 하죠, 하고. 그랬더니 황 장관 왈 "사진 나가면 큰일 납니다"였다. 배석했던 사람이 한마디 거들었다. "크게 쓰란 말이죠." 그날 식사는 온통 웃음바다였다. 강의 또한 말할 것도 없는 일. 비단 그 자리뿐이겠는가. 다음 날 황 장관의 사진은 전국 신문의 1면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물벼락 사건은 우연인가. 아니면 의도된 해프닝인가. 아직도 의문이긴 한데 후자가 아닌가 하는 느낌이 강하다. 황 장관이 실험실에 입장할 때 카메라 기자가 연신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뻔히 샤워기란 걸 알 텐데 모르고 당겼다? 그건 좀 아니지 않을까 한다. 물벼락 사건에 대한 질문에도 황 장관은 그야말로 여유 만만이었다.
하기야 의도가 있건, 없건 그게 무어 대수일까. 깜짝 사건으로 온 국민에게 한바탕 웃음 보따리를 선물했으면 그만인 것을. 여하튼 그 사건은 두고 두고 즐거운 기억으로 남을 듯하다. 그가 온몸을 던져 국민들을 웃게 만든 것, 그게 중요한 게 아니겠는가. 정치가 무슨 코미디냐고 정색하면 할 말은 없다. 그렇지만 웃음을 주는 정치인을 어찌 나쁘다 하겠는가 싶다.
당시는 담뱃세 인상, 누리과정 예산을 놓고 정치 갈등이 첨예화된 시기였다. 서민 증세와 복지 논란으로 정국이 꽉 막힌 상황. 숨이 턱턱 막히는 그런 살풍경에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을 몰고왔으니 의미가 있다 할 수밖에. 곡의 맛을 살려주는 간주라고나 할까, 입맛을 돋궈주는 양념이랄까. 작지만 신선한 몸짓이었다.
사실 우리 정치는 너무 심각하다. 굳은 얼굴과 비방, 막말, 고함, 삿대질…. 늘상 반복되는 일상사다. 그래, 한번 따져 보자. 일마다, 건건마다 사활을 건 투쟁을 해야 하는지. 어차피 상대가 있다면 합의점은 중립지대일 게다. 어느 한 쪽도 일방적인 만족은 어렵다. 벽을 손으로 밀어보라. 미는 만큼 되밀리지 않는가. 상대란 그런 것이다.
우리는 왜 항상 이렇게 심각할까. 마음속에 빈 곳이 없기 때문이지 싶다. 빈 자리는 내가 아니라 당신을 위한 자리다. 그런 양보와 겸양의 덕이 사라진 마음속은 늘 비좁다. 그래서 또 매사에 심각하다. 윈스턴 처칠은 의회 지각 출석이 잦았다. 의원들이 닦달하자 "나처럼 예쁜 부인을 가져 보지. 늦지 않을 수 있는가." 그의 능청스러움은 여유가 묻어났다. 국무회의에서 땅콩만 씹어먹던 레이건 대통령은 총상을 당한 뒤 농담 하나로 모두를 안심시켰다. "영화에선 잘했는데 고개 숙이는 걸 깜빡했지 뭐야."
누군가 이야기했다. 웃음은 권력이라고. 서양의 지도자들은 그래서 늘 연설할 땐 조크를 잊지 않는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김용 세계은행 총재가 한국말로 대화를 나누자 클린턴이 한마디했다. "두 사람 말은 못 알아듣겠다. 한국인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조크를 날렸다. "클린턴 뒤에 연설하는 건 마치 프랭크 시나트라 뒤에 노래하는 것과 같다." 반기문 총장의 유머다. 어째 멋지지 않은가.
우리 정치사엔 이런 유머를 보기 힘들다. 엄숙함과 경건함이 일상사가 된 건 옳고 그름의 경계가 너무 뚜렷하기 때문이다.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 그런 경계 말이다. 한동안은 공무원 연금 개혁으로 성난 얼굴들이 됐다. 여야 합의를 놓고 밀고당기다 수정안에 합의했다. 그렇게 겨우 정상화되는 듯하더니 성완종 파문과 총리 사퇴, 새 총리 인준을 둘러싼 힘겨루기가 이어졌다. 메르스가 세상을 뒤덮는 와중에 이번엔 대통령의 국회법 거부권 행사와 야당의 의정 보이콧으로 또 정국이 얼어붙었다.
정치는 투쟁이니 몸싸움한다고 마냥 나쁘다고만 할 건 아니다. 하나, 끝없이 계속되는 무한 투쟁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친구는 가까이 둬라. 적은 더 가까이 둬라.' 적조차도 가까이 두고 대화하란 말이다. 하물며 정치적 상대라면 말해 무엇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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