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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칼럼] 물 이야기 /이성희

물의 소중함·가치 제대로 알고 느껴야

물도 우리에게 생명의 힘·치유력 베풀어 줄 것이다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5-03-25 19:35:15
  •  |   본지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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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가 내렸다. 상상력의 철학자 바슐라르는 "모든 액체는 물이며, 다음에 모든 물은 젖인 것"이라 하였다. 상상력의 세계에서 물은 깊은 모성이며, 생명을 기르는 젖이다. 봄비를 젖으로 빨아들인 대지의 어린 색채들이 이제 곧 깨어날 것이다. 마당의 정원에서, 거리에서, 그리고 근교의 들녘에서 눈부신 꽃들로 만발하리라. 회색의 겨울을 견디며 제각기 꿈꾸었던 색채와 향기를 마음껏 봄의 대기로 뿜어댈 것이다. 꽃만이 아니라 무거운 외투를 벗어던진 우리들 가슴도 고운 빛으로 사뭇 일렁이지 않겠는가. 가뭄 끝에 내린 봄비의 경제적 가치를 신나게 계산해대는 보도도 있었다. 어디 경제적 가치뿐이겠는가. 그것이 가지는 심리적 가치, 미학적인 가치, 무엇보다 생명의 가치를 어떻게 계산할 수 있겠는가. 봄비 뒤에 맞이한 일요일(22일)은 마침 '세계 물의 날'이었다.

수년 전, 나사(NASA)는 달의 북극에 엄청난 양의 얼음이 있다고 발표해 우리를 놀라게 했다. 화성에 물의 침식작용에 의해 생긴 지층이 있다는 발표도 있었다. 물의 존재는 생명의 전제조건이다. 물은 생명의 지표인 셈이다. 달과 화성에 물의 흔적이 있다는 것은 곧장 생명의 흔적을 환기시키기 때문에 경이로운 상상을 일으키게도 한다. 물이 생명의 근원이기에 그리스 철학자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고 했으며, 동양의 노자도 물에서 도(道)를 보았으니, "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上善若水)"라고 외쳤던 것이다. '장자' 첫 페이지에 등장하는 장대한 우주적 기(氣)의 생명운동이 북명(北冥)이라는 바다에서 시작되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옛날 신성한 제사에는 '현주(玄酒)'를 올렸는데, '현주'란 검은 술이 아니라 새벽의 샘물(우물)에서 처음으로 길은 맑고 깨끗한 물이다. 우리들 어머니가 새벽마다 장독대에 떠놓고 자식들의 안위를 천지신명에게 빌던 바로 그 정화수(井華水)이다. 정화수는 신을 움직이게 하는 최상의 제물이다. 실로 묘한 것이 물이다.

물방울 화가로 유명한 김창열은 1988년 일본 동경화랑의 전시회 때 이렇게 말했다. "물방울을 그리는 행위는 모든 것을 물방울 속에 융해시키고 투명하게 무(無)로 되돌려 보내기 위한 행위이다." 그런데 최근 김창열의 화집을 보면서 새삼 발견하게 된 것은 실물보다 영롱한 물방울의 형상이 아니라 그 물방울의 그림자였다. 물방울의 그림자는 깊은 음영 속에 저마다 고요한 빛을 품고 있었다. 영혼이나 마음 같은 것이 아닐까하는 느낌을 받았다. 화가의 말과는 역으로, 물방울은 무로 돌아가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마다 우주적 마음, 우주적 생명력을 고요히 품고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물이 마음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일본인 에모토 마사루의 책 '물은 답을 알고 있다'를 통해 상당히 충격적으로 배운 바 있다. 물이 단순히 생명의 조건이 아니라 물 그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이니 물을 함부로 대할 일이 아니다.

우리 인체의 60%가 수분이라면 물의 마음이 인간의 마음과 어찌 무관할 수 있을까. 물이 병들면 사람의 마음인들 온전하겠는가. 그렇다면 우리의 욕망이 저지른 저 숱한 오염들, 4대강사업으로 파괴된 이 강산 물과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오염된 태평양의 물들이 사람의 몸과 마음을 어떻게 변화시킬지 자못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물은 스스로를 정화하고 남을 치유하는 힘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바슐라르가 물을 젖이라고 했지만 그 젖은 생명을 기르기도 하고 치유하기도 한다. 그렇지 않다면 세례니 침례니 하는 것이 왜 있겠으며, 병자호란 때 청나라로 끌려갔다가 욕을 본 부인들을 다시 맞이할 때 나라님(인조)께서 "홍제원의 냇물에 목욕을 하고 서울로 돌아오면 그 죄를 묻지 않겠노라"고 공연히 말씀하셨겠는가.

김지하 시인은 해운대 동백섬의 풍수를 영구망해(靈龜望海; 신령스러운 거북이 먼 바다를 바라본다)라고 하였다. 그는 그 속뜻을, 물의 신령한 동물인 거북이 세상의 모든 병든 물을 자신의 온몸으로 삼키고 삭혀서 치유의 영약을 토해내는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해석 또한 물의 자정력과 치유력에 대한 인식과 상상력의 반영일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사람이다. 사람이 제대로 물을 모시는 것부터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미당 서정주의 시집 '질마재 신화'에는 '그 애가 물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걸어왔을 때'라는 제목의 시가 있다. 물동이를 이고 한 방울의 물도 흘리지 않을 때에만 묘한 미소를 띠고 모시밭 사잇길의 수줍은 소년과 눈을 마주치는 소녀의 고운 태를 떠올려보라. 어린 시절 형의 책장에서 훔쳐 읽었던 글이 생각난다. 부산의 작가 김소운의 수필집 '물 한 그릇의 행복'이다. 행복이 어디 멀리 있겠는가. 행복이란 목마를 때 마실 수 있는 물 한 그릇에 있다는 것이다. 물동이의 물을 조심조심 모시는 질마재 신화의 소녀처럼, 김소운의 가슴을 따뜻하게 하는 수필처럼, 우리가 물 한 그릇이 담고 있는 소중함을 느낄 수 있을 때 물은 다시 생명의 힘과 치유력을 우리에게 베풀지 않겠는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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