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에 '푸른길'이 있다. 폭 2m 가량의 좁고 긴 산책로다. 길이가 7.9km. 풀과 나무가 가득 심어져 있고, 벤치와 함께 소공원이 조성돼 있다. 걷고 싶은 생각이 절로 드는 길이다. 원래 광주 도심을 통과하는 경전선 구간 중 광주역~효천역 10.8km가 이설되고 폐선(2000년)이 된 것을 공원화(2002년)했다. 사회적 갈등이 따랐다. 학계와 시민사회가 개발세력에 맞서 싸웠고, 행정기관이 파트너십을 형성함으로써 공원이 가능했다. '그린 거버넌스' 성공 사례다. 시민들은 나무심기와 시설기부로 힘을 보탰고, 예술인들은 재능기부로 문화를 심었다. 그러기를 10여 년, 푸른길은 사람과 자연, 도시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생명공간으로 되살아났다. 요즘 푸른길은 광주의 브랜드가 됐다.

부산에도 이와 비슷한 동해남부선 폐선부지가 있다. 미포에서 송정까지 4.8km, 해안을 끼고 도는 길이다. '해운대 옛 철길'이라 부르자. 그래야 정겹다. 정말 아름다워 감춰놓고 싶은 곳이다. 걸어보면 오감이 열리고 육감이 트인다. 부산에 이런 폐선부지가 돌아온 건 천행(天幸)이다.

광주가 걸어간 '푸른길'과 달리, 해운대 옛 철길은 시민 품으로 온전히 돌아오지 못할 처지다. 당장이라도 상업개발의 깃발을 꽂은 불도저가 들이닥칠 것 같은 분위기다. 부산시가 재차 토론회를 연다, 시민계획단을 만든다, 라운드테이블을 운영한다 하지만, 숨고르기 수순 같다. 키는 한국철도시설공단이 잡고 부산시는 사이드 브레이크를 건 형국. 부산시와 해운대구의 진심을 모르겠다. 서병수 시장은 6·4 지방선거 전 해운대 철길이 선거이슈로 부각되자 '시민환원'을 약속했다. 해운대구는 미포 입구에 안내판을 세워 '자연친화형 여가공간'으로 꾸미겠다고 했다. 그런데도 현실은 반대로 간다.

'해운대 옛 철길' 활용을 둘러싼 쟁점이 '개발 vs 보존' 프레임에 갇히고 있는 것은 문제다. 개발세력들은 "그럼 폐선부지를 녹물이 흐르는 대로 그냥 두자는 말인가"라며 시민환원 운동을 하는 시민단체를 공격한다. 폐선부지를 상업적 수단이 아닌 시민공원 형태로 살려 시민 품으로 돌려달라는 주장이 왜곡되는 지점이다. 논란의 초점은 '개발 vs 보존'이 아니라, '상업개발 vs 시민공원'이다. 생산적인 논쟁이 되려면 프레임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반대 여론이 수그러들지 않자 철도시설공단은 개발 일정을 다소 늦추는 모양이다. 지난 4월 민간제안 공모에 이어 이달 중 주간 사업자를 선정할 계획이었다. 공모에서 선정된 '레일&스토리 컨소시엄'의 '스카이라이더(Skyrider)'는 판만 정리되길 기다리는 형국. 스카이라이더는 미포~송정 4.8㎞ 폐선구간 위에 전동 바이크 시설을 올려 달리게 하면서 관광시설을 조성한다는 아이디어다. 개발이 시작되면 주변 땅값이 오를 테고 누군가는 이익을 얻게 된다. 전형적인 상업개발 구조다.

반전카드랄까, 대안이 없지는 않다. 부산시가 폐선부지를 끌어안는 거다. 국유재산법상 철도부지를 그냥 차지할 수는 없다. 부산시가 사거나 임차해 쓰는 방법이 있다. 임차하면 임대료가 연간 20억 원쯤 된다고 한다. 이 경우 시민적 합의가 필요하다. 광주 푸른길은 기존의 땅을 팔고 다른 땅을 대신 장만해주는 대토(代土) 형태로 문제를 풀었다. 부산시가 그동안 동해남부선 광역철도 건설에 3000억 원의 분담금을 지불해 왔다니 정치권과 함께 정부를 설득하면 해결책이 없지도 않은 셈이다. 이런 걸 제쳐 놓고 민간 사업자를 끌어들여 상업개발에 올인하는 것은 공익이 아니다.

이달 초 제주에서 '제1회 아시아 트레일즈 콘퍼런스'가 열렸는데, 여기서도 해운대 철길이 이슈가 됐다고 한다. 시민운동을 주도해 온 '해운대 기찻길 친구들'에 따르면 이 자리에서 전국의 길 전문가 100여 명이 '시민환원 운동'에 동참하는 서명을 했다. 서명자 중에는 소설가 조정래, 제주올레 이사장 서명숙, 국제구호전문가 한비야, 시인 김초혜, 건축가 김원 씨 등 유명인사가 대거 포함돼 있다. 가벼운 움직임이 아니다.

요란하지 않으면서 의미 있는 시민운동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해운대 기찻길 친구들'은 지난 6월 열린 '대학생 대상 폐선부지 창의 아이디어 공모' 수상작품 전시회를 준비 중이다. 부산작가회의를 중심으로 문인들의 폐선 지키기 작품 활동도 이어지고 있다. 부산대 예술문화영상학과 학생들은 현장수업을 통해 '폐선 공감 대안찾기'에 나선다고 한다. 적막한 폐선부지에 몇 가닥 기적(汽笛)이 울려퍼지는 듯하다.

폐선이 아름다운 것은, 그 속에 무한한 평행과 평형,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꿈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폐선은 상상력과 창의력의 텃밭이다. '폐선은 자유다!'라고 외쳐보자. 개발세력에게 폐선의 꿈을 앗겨서는 안 될 말이다. 결국은 폐선을 지키는 것도, 잃는 것도 시민이다. 기적은 결코 그냥 일어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