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정한 법정기념일은 적어도 그날 하루만은 그 뜻을 되새기자는 의미다. 풀뿌리민주주로 통하는 지방자치도 그날이 있다. 바로 10월 29일이다. '지방자치의 날'로 올해가 2회다. 2012년 10월 국회에서 지방자치에 대해 국민의 관심을 높이고 그 성과를 공유하기 위해서 만든 거다. 이 고상한 취지와는 달리 국민 대다수는 그런 날이 있는지조차 모른 채 지나갔다.

자기 동네나 지역 문제를 가장 가까이에서 다루는 자치장이 아직 주민들에게 다가가지 못하기 때문이리라. 기초의원, 기초단체장, 광역의원, 광역단체장 등 4대 지방선거를 치를 때 반짝 관심을 기울이는 정도다. 지방자치가 시행된 지 강산이 정확히 두 번 바뀔 만큼 세월이 흘렀지만 현실은 그렇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날 "지난 20년 동안 우리 지방자치는 주민 중심의 자치행정을 통해 민주주의를 발전시켜왔고, 지역고유의 특성을 살려 지역발전을 이끌어왔다"는 축하메시지를 띄웠다. 국가지도자로서 기념일 덕담 차원이라 하더라도 미진하다. 오히려 "지방은 국민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자 수많은 정책과 사업이 진행되는 현장으로, 민주주의와 국가발전의 근본 토대"란 전제 아래 "자율과 책임이 조화를 이루는 성숙한 자치, 역동적인 건전한 지방자치가 이뤄질 때 대한민국이 진정한 선진국 대열에 우뚝 설 수 있다"는 정종섭 안행부 장관의 기념사가 원론적이지만 지방자치의 방향을 정확히 제시해 더 와닿는다.

20년이 지났어도 기념일에 원론적 가치가 언급된다는 건 제도가 아직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 아닐까. 주민 따로, 지방자치 따로 겉돌고 있는 것이다. 정치 지형이 한쪽으로 기운 부울경은 더 심하다. 마치 평형수도 제대로 채우지 않고 항해하는 '지방자치호'나 다름없다.

선거 후 기초의회 의장단 구성을 둘러싼 꼴불견 소동은 4년마다 되풀이되는 행사다. 풀뿌리민주주의 교육장이란 말은 자라나는 아이들을 생각한다면 입에 올릴 수도 없을 정도다. 올해도 이런 추태는 어김없었다. 부산 해운대구의회에선 야당 구의원이 새누리당 구의원들의 전횡에 반발해 본회의장에 휘발유를 뿌려 구속되는 사단이 빚어졌다. 다른 기초의회도 정도의 차이만 있었지 대동소이하다.

소선거구제인 광역의회는 새누리당 일색으로 구성돼 선수(選手)가 '왕'이다. 부산시의회의 경우 3선 이상 7명이 모여 최고 다선인 4선 두 사람에 상·하반기 의장을 맡기기로 결정했다. 다른 초·재선 40명의 선택지는 없었다. 선거 과열을 우려해서라는데 의장선거조차 제대로 치를 수 없는 시의원 수준임을 세상에 알리는 꼴이다.

지방의회가 이런 식이니 주민들이 일상에서 겪는 불편이 눈에 들어올 리 만무하다. 영도구 청학동에 길이 257m 이면도로 공사가 2006년 공사에 들어갔지만 104m만 뚫린 채 지금껏 도로 구실을 못하고 있단다. 사연을 들어보면 기가 찬다. 영도구청이 시비로 도로를 낼 계획이었는데 첫해 8억 원으로 착공했지만 이후 10억 원이 내려오지 않아 손을 놓고 있는 거다. 대관절 해당 지역 구·시의원은 그동안 뭐하고 있었으며 구청장은 또 뭐 하는 사람인가. 이런 일을 찾는다면 다른 지역이라고 없을 리 없다.

구의회와 구청장이 감정싸움으로 치달아 전국적으로 공개망신을 산 적도 있다. 2009년 7월 부산 동구 수정동 재해현장이다. 집중호우로 빗물과 토사에 20여 대 차량이 휩쓸려 저지대 주택가 골목을 가득 메웠다. 마치 일본 쓰나미에 밀려온 배들이 들판에 널브러져 있는 것과 흡사한 기상천외의 광경이라 도하 모든 신문의 1면을 장식했다. 수정산 중턱을 깎은 상태에서 구민체육공원이냐 생태공원이냐를 두고 양측이 7개월간 다툰 결과다. 주민 안위와 부산의 지방자치가 수장되는 몰골을 전국에 확실하게 홍보했다.

4년간 지역 살림을 책임진다는 소명의식이 있다면 생각할 수 없는 장면이다. 그렇다고 공천권을 쥔 지역 국회의원들이 이럴 때 제 역할을 하느냐면 그렇지도 못하다. 정반대로 자치능력에 반비례해 해당 의원은 중앙무대에서 호사를 누리는 것도 쉽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영도구는 김형오 전 의원이 5선으로 국회의장을 지냈고 이어 김무성 의원이 당대표로 있다. 동구의 정의화 의원 역시 5선으로 현재 의장이다.

지방자치를 배로 비유하면 선사는 새누리당이라 하겠다. 지자체란 배들이 위태롭지만 저마다 관심 밖이다. 20년간 문제가 없었는데 무슨 일이 생기겠느냐는 투다. 그사이 경력이 쌓인 선장은 선사 대표나 나라 전체 선사의 장을 꿰차기까지 하니 그럴만도 하다.

승객인 주민의 편의보다 침몰만 하지 않고 오래 운항하는 선장이 출세하는 구도다. 평행수 대신 화물이 더 중요한 선장과 항해사들이 있는 한 지방자치호는 언젠가는 세월호 신세를 면키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