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이미 오래전 이야기이다. 신자유주의적 시장 경쟁 논리가 상아탑의 뿌리를 뒤흔들고 있으며, 학문의 자유는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대학에서 인문학 관련 학과를 박대하는 것과는 달리, 인문학 자체에 대한 수요와 열망은 여전히 높고 강하다. 모두들 '인문학의 위기'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인문학에 대한 관심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오히려, '인문학이 언제 위기가 아닌 적이 있었느냐'는 듯이, 우리 사회의 인문학 열풍은 지속되고 있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조금만 교양이 있는 사람이라면, 너도나도 인문학 강좌를 수강하고 또 인문학적 지식을 각자의 삶에 장착하고자 한다. 'CEO를 위한 인문학'도 있다. 그래서일까? 이제 인문학은 마치 사회생활을 위해 새로운 데이터를 '보충'하고 '교환'해야할 신규 교양의 목록이자, 다시 업데이트해야 하는 프로그램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쩌면, 이미 인문학은 '도구화'되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혹자는 인문학이 지친 현대인의 삶을 정신적으로 치유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면, 다소 '도구적 성격'을 지니는 것이 무엇이 나쁘냐고 말할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인문학을 도구적 시각으로 이해하는 것은 생각보다 심각한 문제를 내장하고 있다. 인문학의 도구화는 '경쟁'과 '성장'의 원리를 중시하는 자본주의적 시각을 내면화하고 재생산하는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자본주의의 폐해를 다 이야기할 수는 없다. 다만, 지금의 자본주의 체제가 사회적 소수자나 경제적 약자를 배려할 수 없는 생산/분배 구조와 착취 시스템을 내장하고 있다는 점만은 말할 수 있겠다. 그래서 현대의 자본주의 체제는 어떤 방식으로든 수정되고 개선되어야 하는 것이다. 지난 대선에서 '경제 민주화'가 각 진영의 뜨거운 감자가 된 것도, 현재 복지와 연금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되는 것도, 또 최근 서점가에서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이 선풍적 인기를 끄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니겠는가.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인문학이 곧장 반자본주의적 혁명을 추동하는 선전 도구, 혹은 '혁명 전사'를 양성하는 입문 통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과 '자본'을 읽는다고 해서 모두가 '공산당'이 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런 책들이 여전히 우리에게 소중한 울림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공산주의 혁명에 대한 이론도, 혹은 복잡한 사회주의 사상 때문만도 아니다. 오히려 이는 '자본'을 쓰게 된 쓴 칼 마르크스의 저술 의도, 즉 '타인을 감각하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마르크스가 살았던 시기에는 어린 아이들이 15시간 이상의 중노동에 시달렸다. 그러면서도 제대로 된 임금을 받지 못했으며, 그에 상응하는 복지 역시 누리지 못했다. 자본가는 노동자를 착취했고, 노동자는 자기 자신을 위한 노동이 아니라 자본가를 위한 잉여노동을 반복하며 살았다. 마르크스는 자본(가)의 착취가 아무 거리낌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당대의 사회·경제적 문제를 '공산당 선언'과 '자본'이라는 저술을 통해 풀어내고자 한 것이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다시 마르크스의 '자본'을 읽는 이유는 복잡한 인문학적 지식을 쌓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가 인식했던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를 우리 시대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감각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진정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우리가 인문학을 공부하는 것은 '사상'의 구조를 이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마음'의 구조를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인문학은 소외되고 배제된 이들을 비추는 지식의 등불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사상의 인문학이 아니라, 마음의 인문학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 인문학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지식'도 있지만, 그 지식은 나와 타인의 관계를 비추는 '마음의 등불'이 되어야 한다. 인문학은 단순히 지식을 습득하고 축적하거나, 그 지식을 통해 자기 삶만을 살찌우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장과 경쟁을 강조하는 자본주의적 시각에 더 가까우며, 사람의 무늬를 탐구하는 인문학의 정신과도 맞지 않다. 오히려, 인문학은 우리 사회의 불평등한 구조를 이해하고, 그것을 내파(內破)하는 '불화의 시선'을 기르는 과정이다. 이 불화의 시선을 통해 사회적 불평등을 보다 공평하고 건강한 방향으로 변화시켜 나가는 것이 인문학의 역할이다. 그래서 인문학은 지식을 통해 '타인'을 개조하는 계몽의 여정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시각과 삶의 태도를 변화시키는 '자기 혁신'의 과정이기도 하다. 즉, 인문학은 타인을 이해하고 공통의 삶의 조건을 모색하는 '자기 혁명'의 길이며, 이와 같은 자기 혁신을 통해 우리의 삶을 점진적으로 변화시키는 지식의 실천에 가깝다. 지식의 램프로 우리 사회의 어두운 곳을 비추고 감각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문학을 공부하는 진짜 이유이다.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