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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칼럼] 궁류 가는 길 /이성희

거칠어진 삶의 상처 위로하고 달래는 곳

그 공간에 닿게 하는 나만의 비밀지도 한 장쯤 품고 싶다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4-09-24 19:58:52
  •  |   본지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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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류(宮柳) 가는 길, 어느 샌가 가을이 저만치서 따라오고 있다. 길을 따라 햇살이 일렁이는 논에는 벼들이 조금씩 연금술을 펼치며, 흙과 물과 햇살과 공기를 황금의 낱알로 변성시키고 있다. 키가 큰 수수들이 바람을 연주하며 몸을 흔든다. 잠자리가 나는 어디선가 메밀꽃 한 무리가 잠시 쌓이는 싸락눈처럼 한곳에 피어있다.

군데군데 지붕을 맞대고 모여 있는 집들이 따뜻한 삶을 품은 오후의 정적 속에 스쳐간다. 막걸리 냄새가 배인 이야기들이 스쳐간다. 봉황대 기암절벽, 일붕사(一鵬寺)가 멀리 스쳐간다. 예동마을 지나 평촌마을, 평촌마을 지나 주민이 10여 명밖에 되지 않는다는, 차가운 비가 자주 내린다는 한우산(寒雨山) 골짜기 마을로 가는 길.

궁류 가는 길, 낡은 자동차의 낡은 내비게이션은 가끔씩 길을 잃는다. 내비게이션은 방향을 잃고 허공을 떠돌고 골짜기는 커브를 튼다. 아내는 운전을 하고 운전을 못하는 나는 가물거리는 기억과 내비게이션과 이정표를 뒤섞으면서 길을 찾는다. 언제나 제자리이면서도 바쁘기만 한 삶이 한동안 잊게 했던 누군가를 찾아 가는 길, 궁류 가는 길이 아득히 깊어간다. 그 길의 끝에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다. 산 구비를 돌아 이정표가 끝나는 곳 너머, 내비게이션의 정보를 벗어나는 곳에서 만날 가슴 따뜻한 사람이 있다는 이 은밀한 설렘을 바람이 먼저 눈치 채고 느낌표 소리를 내며 귓불에 닿았다가 푸르게 물러난다.

누구에게나 모종의 장소에 대한 꿈과 몽상을 품고 있는, 자신만의 내밀한 지도 한두 장 있기 마련이다. 삶이 척박할수록 더욱 그러하리라. 더러는 식탁이나 책상의 유리 밑에 끼워져 있어 출근길에 나서기 전 지도 속으로의 여정을 잠시 음미하게도 하고, 더러는 거미가 줄을 친 궤짝 속에 버려진 채 하염없이 낡아가기도 하리라. 귀퉁이가 헤지고 선이 바래지면서 낡아가다가 어느 날 뜻하지 않은 연유로 우연히 발견되었을 때, 마치 늙은 해적이 남긴 '보물섬'(스티븐슨 작)의 비밀스러운 지도처럼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기도 하리라.

규장각에서 발견된 18세기 조선인이 그린 '천하도'는 알 수 없는 신비를 감춘 비밀지도처럼 진기한 세계의 모습을 보여준다. 중국 대륙과 조선 반도를 바다가 둘러싸고 있으며, 바다에는 기이한 이름의 섬들이 흩어져 있다. 그 바다 바깥에 환상(環狀)의 육지가 바다를 둘러싸고 있고 그 육지 밖에 다시 바다가 육지를 둘러싸고 있다. 이 지도는 고대 지리서이자 신화집인 '산해경'의 세계를 지도로 그린 것이라 추측된다. 어쨌든 이 지도를 그린 사람은 지도를 꺼내볼 때마다 늘 그 경이로운 세계로의 여행을 황홀하게 꿈꾸었으리라.

중국 회화사를 통털어 최고의 기예로 평가되는 원나라 말기의 화가 왕몽은 가장 복잡한 디자인의 산수를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예찬이 주로 여백으로 가득한 고담(枯淡)한 풍경을 보여준 반면, 왕몽은 화면에 여백을 거의 남기지 않고 촘촘하게 세부를 그렸기 때문에 이 둘은 각각 소(疏; 성김)와 밀(密; 빽빽함)의 회화 양식을 대변하게 되었다. 왕몽의 그림은 미로로 가득 차 있다. 미로는 산과 골짜기와 계곡 사이에서 갈라지고 꺾이고 숨으면서 아슬아슬한 곡예를 부린다. 그리고는 어느덧 그림의 중심부에 있는 은밀한 은거지에 닿는다. 왕몽의 그림을 감상할 때 이 미로들을 추적해 보는 것은 쏠쏠한 재미다. 아마 왕몽은 자신만의 내밀한 지도를 작성하고 싶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는 난세를 피하여 20년 동안 황학산에 은거했다. 그의 그림은 자신의 은거지 지도이거나 혹은 자신만이 알고 있는 이상향의 비밀지도였을지 모를 일이다. 그 지도들은 황량한 은거 생활에 지친 왕몽 자신을 위한 위로였을까?

나도 이제 한 장의 내밀한 지도를 품고 싶다. 궁류 벽계리로 가는 지도, 아프고도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그리고 이제 피붙이 하나 없이 허리가 그믐달처럼 굽은 채 홀로 살고 있는 이모의 은거지로 닿는 지도, 이모의 삶을 껴안아 주었던 그곳, 거칠어진 삶의 상처들을 위로하고 달래주는 곳, 막혔던 심호흡을 마음껏 할 수 있는 마을이 그려진 지도, 가을이 물드는 길의 지도를 말이다. 이 험난한 재난의 시대에 조용히 은거지의 지도 하나쯤 품는다고 해서 무어 이상하랴.

몽상의 시학자 바슐라르는 그의 책 '공간의 시학'에서 내밀함이 깊어지는 만큼 공간은 무한해진다고 하였다. 궁류 가는 길, 아내와 함께 헤맨 길, 세상의 숨 가쁜 길에서 잠시 벗어난 여정이란 내 거친 마음이 조금 더 내밀해지면서 부드러워지는 시간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품을 들녘과 길의 지도도 더 넓어지고 풍요로워질 것이다. 삶에 지칠 때마다 우리는 자주 그 지도를 꺼내 볼 것이다. 자꾸만 무한해져 가는 지도를 펴면, 궁류 가는 길은 벌써 가을이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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