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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칼럼] 가난한 비만, 풍요 속 빈곤 /최원열

가난을 먹고 자라는 비만은 질병·사회문제

한국 양극화 심각해도 정치권은 이전투구만…서로 이해·양보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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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백을 꺾은 지 제법 되었기에 건강에 무척 신경 쓰인다. 그래서 작심하고 택한 게 숲길 산책이다. 집 근처 둘레길은 최적의 트레이닝장으로 손색이 없다. 혈기왕성했던 시절 땀을 뻘뻘 흘리고 가쁜 숨을 토해내면서 일초라도 빨리 정상에 오르려 했던 등산과는 거리를 두기로 했다. 나이도 그런데다 쫓기듯 바쁜 일상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느림으로 치유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슬로 워킹은 뜻밖의 즐거움을 한가득 안겨준다. 아파트촌을 지나 숲에 들어서는 순간 세상은 별천지로 변한다. 열화산같은 햇살은 온데간데없고, 속시원한 청량감이 온몸을 감싸온다. 속도를 줄이자 오감이 순식간에 깨어나면서 빛을 발한다. 나무들이 뿜어내는 푸름은 지쳐있는 눈의 피로를 풀어주기에 충분하다. 졸졸 흘러내리는 물소리와 새들의 지저귐은 베토벤 교향곡 전원을 연상시키며 귀를 간지럽힌다.

향긋한 숲 내음을 마음껏 들이켜는 기분이란. 자연의 하모니가 이런 것이로구나. 형용할 수 없는 벅찬 감동은 속세에 찌든 때를 말끔히 씻어준다. 도원경이 이런거지, 뭐. 마음속에 되뇌니 드넓은 우주가 품에 들어오는 듯하다.

건강에도 골든타임이 있다. 놓치면 병들고 쇠약해지는 건 시간 문제다. 신체를 잘 다스리고 가꿔야 하듯이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겉으로는 풍요롭게 보일지 모르나 속으로 썩어가는 건 심각한 증세다. 최근 미국을 뒤흔든 퍼거슨시 흑인 소요사태가 바로 그렇다. 10대 흑인청년이 백인 경찰관의 무차별 총격에 희생된 사건은 언뜻 흑백 갈등이나 인종차별로 보인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원인이 숨어 있다. 교외빈곤층 문제가 그 뿌리다.

인구 2만 명이 조금 넘는 소도시 퍼거슨의 빈곤층 비율은 22%에 달한다. 불과 10년 만에 배 이상 늘었다. 실업률은 가파르게 치솟고, 인구 구조가 급격히 변했다. 인근 세인트루이스시는 미국 대도시 중에서도 손꼽히는 성장률을 자랑한다. 부동산 시세도 천정부지로 뛴다. 빈민층은 삶의 터전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다. 땅값이 싼 교외 지역으로 말이다. 돈이 없으니 범죄가 늘 수밖에 없는 악순환의 고리에 갇히게 된다. 어디 퍼거슨뿐이겠나. 5000만 명에 달하는 미국 빈곤층의 절반이 그렇다. 풍요 속 빈곤의 실상을 이번 사태는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다시 건강 문제로 돌아가서 최근 눈에 띄는 소식이 있다. 뱃살과 비만 문제를 다룬 것으로 '가난한 비만'이 늘고 있다는 뉴스다. 최근 5년간 조사를 해봤더니 부유층보다 빈곤층이 비만해질 확률이 무려 18배나 높게 나왔다. 건강에 아낌없이 돈을 쓰며 영양을 챙기는 부자와 달리 가난한 사람들은 신경쓸 여유가 없다. 칼로리만 높은 값싼 정크푸드에 의존하다 보니 뱃살이 찔밖에.

이른바 비만이 가난을 먹고 자라는 시대가 시작됐다. 가난의 대물림으로 대한민국은 바야흐로 비만 공화국으로 가는 티켓을 끊은 셈이다. 가난한 비만은 빈곤과 풍요가 극단으로 치닫는 현대 문명사회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비만을 질병인 동시에 양극화와 직결된 심각한 사회문제로 인식해야 한다는 얘기다. 따라서 비만을 단순히 치료의 문제로 봐서는 안 된다.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사람들이 빈곤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지원해줘야 한다. 국가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도 힘든 판에 팔짱만 끼고 있어서야 되겠나.

지금 대한민국은 어디로 향하는지 모를 정도로 혼돈 상태다. 교황이 그토록 소통과 대화로 해결하라며 타일렀거늘 정치판과 정부는 세월호 해법을 아직도 찾지 못하고 싸움박질에 열중이다. '바바리' 검사와 군부대 사태 등 곪아있던 온갖 비리들이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듯 일시에 터져나온다. 비정상의 정상화는커녕 네탓만 외치며 귀를 닫고 있다. 이를 지켜보는 국민들은 울화통이 터지고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분열과 갈등으로 국민 건강이 우려될 만큼 심각한 상황에 처했다. 어떻게든 힐링이 필요하다.
슬로 워킹을 권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걷다 보면 화는 가라앉고, 머리는 정돈된다. 건강을 되찾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 운동량이니 칼로리를 따질 필요도 없다. 걷고 즐기기만 하면 되는 손쉬운 치유법이 또 있을까 싶다. '걷기 예찬'의 저자 다비드 르 브르통은 간결한 정의를 내렸다. 세계를 느끼는 관능에의 초대라고. 걸음으로써 시간의 노예에서 주인으로 회복된다며. 참으로 가슴에 와닿는 명언이다.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속도와 효율에서 벗어나는 순간, 세상을 내려다볼 여유를 갖게 될 것이고 한 단계 올라선 성숙의 맛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면 화려한 등장은 있을지언정 아름다운 퇴장을 할 수 없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양보하며 눈높이를 맞추는 건 비단 정치판뿐 아니라 온 국민이 염두에 둬야 할 인생 철학임을 모두가 깨달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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