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난 악마의 거울이 허공을 떠다니다 카이란 소년의 눈과 심장에 박힌다. 카이는 잔인하고 심술궂어진다. 여자 친구 게르다는 카이의 변한 모습에 슬퍼한다. 어느 날 눈의 여왕이 나타나 카이에게 키스한다. 기억을 잃은 카이는 여왕을 따라 얼음성으로 간다. 게르다는 카이를 찾아 길을 떠난다. 그녀는 온갖 고난 끝에 마침내 여왕의 궁전에 도착한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카이에게 게르다는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그녀의 눈물이 카이의 심장에 박힌 거울조각을 녹이자 카이도 눈물을 흘렸고 눈에 박힌 조각도 빠져 나왔다. 카이는 다시 기운차고 건강한 소년으로 되돌아 왔다. 둘은 손을 맞잡고 기쁨의 노래를 부른다.
안데르센의 동화 '눈의 여왕'의 줄거리다. 인간을 구원하는 유일한 도구는 사랑이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이 동화는 안데르센 특유의 몽환적인 필치 덕에 세대를 이어가며 전 세계 아이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이 동화 속엔 인간을 황폐하게 만드는 건 '기억의 상실'이라는 경구도 담겨 있다. 정체성의 상실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큰 재앙이란 거다. 그 재앙은 사랑하는 이의 눈물로만 회복되고 치유될 수 있다고 안데르센은 말한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인간에게 '망각'은 축복이기도 하다. 살아가면서 겪는 그 숱한 희로애락의 기억이 하나도 잊혀지지 않고 두뇌 속에 생생히 남아 있다고 상상해 보라. 망각은 기억의 고문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는 자기방어 기제이기도 한 것이다. 뇌에 전달된 외부자극이 단백질의 합성을 유도해 '기억 덩어리'를 만든다. '기억 덩어리'는 얼마간 뇌 세포 속을 떠돌다가 사라지는데 일부는 신경그물에 걸려 고정된다. 이게 기억이란 거다. 에빙하우스의 '망각곡선'이라는 게 있다. 무의미한 13개의 철자를 외우면 19분 후엔 41.8%를 잊고, 63분이 되면 55.8%를, 한 달 후엔 78.9%를 잊어버린다니 인간의 기억력이란 것도 믿을 게 못 되는 모양이다.
망각이 축복이라 해도 끝내 사라져선 안 되는 기억도 있는 법이다. 불 위에 얹어둔 주전자에 손가락을 갖다댄 아기는 화들짝 놀라 울지만 그 뜨거움의 기억이 뇌리에 남아 함부로 불 옆에 다가가지 않게 되는 게 아닌가. 카이가 끝내 게르다를 기억하지 못한 채 영원히 얼음 여왕의 궁전에 갇혀 있다고 생각해 보라. 그럼 안데르센의 동화는 끝내 미완성으로 남지 않겠는가. 2014년 한국사회의 가장 뜨거운 감자는 말할 것도 없이 '세월호 참사'다.
그런데 넉 달의 시간이 흐르면서 '세월호'란 기억 덩어리는 우리의 뇌세포에서 사라지고 있다. TV 카메라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안전한 나라'를 국정의 최우선으로 삼겠다고, 국가 대개조에 나서겠다고 다짐했던 박근혜 대통령의 입에서 '세월호'가 사라진 지는 이미 오래다. 대통령은 요즘 '경제 살리기'란 화두를 연일 설파 중이다. 죄인을 자처하며 유족들에게 머리를 조아렸던 여야도 동화 속의 카이처럼 변했다.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둘러싸고 배짱을 튕기는 여당이나 대충대충 합의를 이끌어내려고 조바심치는 야당을 보라. 대통령이나 여야나 지금 국민을 '망각의 늪'에 빠트리려 하고 있는 건 마찬가지인 성싶다.
대통령과 국회가 '세월호 무력화'를 시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 자신의 망각 때문이다. 생때 같은 아이 300명이 수장됐을 때 우리는 얼마나 슬퍼하고 부끄러워 했던가. 그런데 서서히 그날의 황망함을 잊어버리고 있질 않은가. 우리 사회 일각에선 '세월호 피로 현상'조차 나타나고 있다. 세월호고 뭐고 같은 소리 자꾸 듣다보니 식상하니까 이제 좀 그만하라는 거다.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단식 중인 세월호 유족을 비난하는 움직임마저 일고 있다. 아직 건져내지도 못한 시신이 10구나 남은 터에 이런 소리가 나오니 유족들로선 피눈물이 날 노릇이다.
하지만 지난 넉 달을 곰곰이 뜯어보라. '세월호'와 관련한 대통령과 정부의 약속 중에서 실천에 옮겨진 게 있었는가를. 단 하나도 없다. 수장되는 생령들을 눈뜨고 놓친 해경을 해체하겠다고 서슬 시퍼랬던 대통령이다. 관피아를 척결하고 재난대응시스템을 근본에서부터 뜯어고치겠다던 정부다. 도대체 무엇이 이뤄졌나? 사고 원인을 규명할 제대로 된 '특별법'이라도 만들어 달라는 유족들의 절규조차 사법체계가 손상된다느니, 어쩌느니 묵살하고 있지 않은가.
에빙하우스는 인간이 망각의 곡선에서 벗어나려면 재학습을 통해 잃어버린 기억을 보충해야 한다고 말한다. 당연한 말이다. 외웠던 영어단어 철자를 잊었으면 다시 단어장을 꺼낼 수밖에 없지 않은가. 프란치스코 교황이 우리 뇌리에서 잊혀져 가는 '세월호'의 기억을 일시 일깨워 주었지만 이대로라면 세월호에 대한 사회적 망각은 빠른 속도로 진행될 것이다. 그러기에 유족들이 "교황의 관심이 고맙긴 하지만 교황이 떠나고 나면 다시 잊혀질 것"이라고 걱정하지 않았던가. 권력을 가진 자들은 이런 사회적 망각을 부추기려고 온갖 시도를 할 게다. 자식을 떠나보내고 제 목숨을 담보로 단식하는 유족들을 '떼쟁이'로 몰아 국민 여론으로부터 차단시키려는 움직임도 이미 보인다.
하지만 다시 기억하자. 지금 이 순간까지 '세월호'와 관련한 그 어떤 약속도 이행되지 않았음을. '세월호'를 망각하면 우리는 영원히 여왕의 얼음성에 갇혀 버리고 만다는 것을. 뜨거운 주전자의 기억을 잊고 다시 불 옆으로 다가가는 아기가 되고 만다는 것을. 10년 후에 '제2의 세월호' 참사를 목격하고 싶은가. 아무것도 바뀐 게 없는데도 "피곤하니 그만하고 넘어가자"는 소리를 어찌 차마 꺼낼 수 있는가.
안데르센 동화 속 '악마의 거울조각'을 우리의 심장과 눈에 박아 넣으려 하는 자들은 과연 누구인가. 대통령이 흘린 눈물은 과연 게르다의 눈물인가. 아니, 그때 우리가 흘린 눈물은 진짜였을까. 유족들의 심장에 깊이 박힌 분노와 원한의 거울조각을 녹여 빼내려면 우리는 또 무얼 해야 하는가. 지금은 다시 '세월호'란 이름의 단어장을 꺼내야 할 때가 아닌가. 심사가 복잡해지는 눅눅한 늦여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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