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유학시절 가장 인상 깊었던 것 중의 하나는, 1000명 남짓이 들어가는 초대형 강의실에서도 아주 초보적인 질문조차 망설이지 않는 당당한 학생들의 태도였다. 우리 같았으면 조심스레 옆 친구에게 물어보거나, 나중에 혼자 들여다봐야겠다고 생각하기 일쑤였을 게다. 하지만 더 나아가 동료학생들과 교수의 태도도 놀라움이었다. 비웃어버리거나 핀잔이나 오갔을 법한 상황에서, 모두가 함께 귀 기울여 듣고 최대한 알아들을 수 있도록 정성과 예의를 다하는 교수님이라니. 열린 사회란 바로 이런 것이라는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이제 어느덧 입장이 바뀌어 대학교수로 재직하게 되면서 소위 재야학자의 메일이나 전화, 심하면 직접 방문까지도 경험할 때가 종종 있다. 이른바 평소에 호기심과 관심이 많아서 여러 가지 생각을 접목시켜본 결과, 나름 획기적인 물리학적 발견을 했으니 한번 검토해달라는 것이다. 학문이 교수들에게만 독점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구나 큰 관심을 갖고 여러 가지 발상의 전환과 노력을 통해 자연의 섭리를 알아가는 것은 지극히 귀하고도 아름다운 일이다. 그렇기에 필자도 진지하게 검토하고 솔직한 답변을 드리기도 하고, 심지어 개인발표를 청취한 적도 있다. 그런데 어김없이 마주치는 문제는, 열정은 차고 넘쳐서 존경스러울 정도인데 논리를 전개하는 기반(대부분 공리나 정의에 대한 부분)이 너무나 터무니없어서, 그 이야기가 맞고 틀리고를 판단하기 이전에 의사소통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유학시절에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학문적 분위기를 인상 깊어하더니, 이젠 입장이 바뀌었다고 학문적 불통을 느낀다니 이 얼마나 모순된 이야기인가. 폭넓은 대중과 학생들의 학문에 대한 관심과 활발한 의사소통이야말로 대학이 진정으로 이 사회에 기여하고 학문과 사회가 함께 발전하기 위한 필수적인 기반임은 분명하다.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현재 대학은 당초 학문의 메카로서 사회에 기여하는 열린 공간이 되기는커녕, 학생들의 취업을 위한 교육에 매몰되어 직업학교로 전락하거나, 이윤창출에 도움이 되는 산업을 위한 산업체연구소의 모습이다. 취업도 중요하고 전문지식의 산업화를 통한 경제기여도 물론 중요하지만, 당초 대학의 정체성인 학문의 요람으로서의 역할을 거의 완전히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물론 학벌을 의식한 입시교육과, 이윤과 성과만능주의가 팽배한 사회 환경의 탓도 크지만, 동시에 전문지식의 연구자이자 교육자로서 교수들의 직무유기는 없었는지 자문하게 된다. 따지고 보면 아인슈타인도 처음엔 일종의 취미과학자가 아니었던가. 어째서 우리의 대학에는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학생들과의 끝장토론이 없으며, 학문에 대한 열정과 관심을 공통분모로 하는 대중과 전문가 간의 교류가 불가능하며, 한걸음씩의 (섹시하지는 않지만 중요한) 탄탄하고 꾸준한 연구 축적물은 부재한 것인가.
모름지기 강의는 권위적, 일방적이 아니라 친근하고 상호적이어야 하고, 문제풀이보다 근본적인 필요성에 공감된 정의와 같은 기초개념이 대중적 교양이 되어야 하며, 연구는 섹시한 활용도를 따지기 이전에 순수한 학문적 동기에 바탕을 두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대학은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학문의 요람이자 전당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교수는 연구비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학생으로부터 외면당할 것을 염려해야 하며, 대학은 학위과정과 수여는 엄정하고도 명예롭게 이루어지도록 하되, 학문의 대중화에는 눈높이를 낮추어 일반대중들에게 학문을 전하는 공간과 계기마련에 보다 적극적이어야 한다.
최근 인구의 감소와 더불어 정원감축을 골자로 하는 대학구조개혁이 정부 주도하에 진행 중이지만, 이 논리에 의하면 적령인구에 맞추어 대학 전체의 규모와 역할은 들쭉날쭉할 수밖에 없으며, 그나마 취업과 산업화와 무관한 순수 학문분야는 더는 대학에 남아 있을 수도 없어 보인다.
변화하지 않는 모든 것은 결국 멸종될 수밖에 없다는 진리를 상기하며, 우리의 대학도 변해야 한다는 데에는 적극 동의한다. 하지만 진정한 변화는 내부에서 시작돼야 하며, 거시적이며 근본적인 변화의 지향점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현재 정부 주도의 대학구조개혁은 문제가 많다. 동시에 대학의 정체성 회복을 위한 교수들의 자발적인 변화에 대한 노력 없이는 어떠한 외침도 공허하게 들릴 수밖에 없음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부산대 물리학과 교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