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부산메디클럽

[인문학 칼럼] 다시 시를 꿈꾸며 /이성희

시장·이념의 논리가 삶의 양식을 차지하고

나와 너, 사물을 잇는 생명의 꽃이 시들어도 꿈꾸는 이들은 남았다

  • 국제신문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4-07-30 23:03:25
  •  |  본지 27면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주소복사
  • 스크랩
  • 인쇄
  • 글씨 크게
  • 글씨 작게
   
다시 시를 꿈꿀 수 있을까? 오래전 첫 시집의 시에서, 내 삶의 어느 황폐했던 겨울 언저리를 추억하는 시에서 "나는 다시 시를 꿈꾼다"라고 썼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그리고 20년이란 세월이 지난 지금, 스멀거리는 안개처럼 실체가 없어진 시의 꿈을 다시 떠올려 본다. 도대체 이 시대에 다시 시를 꿈꿀 수 있을까? 며칠 전에 만났던 그 어린 눈동자들이 등 뒤를 미행하며 자꾸만 질문을 던진다, 비수처럼.

지난 토요일, 백년어서원 '청소년 창작캠프'에서 만난 아이들의 눈동자는 정말 초롱초롱했다. 인적이 뜸해진 공휴일의 중앙동, 그 쓸쓸한 골목 한 구석에서, 놀랍게도 시를 쓰겠다는 시대착오적 꿈을 꾸는 대학생과 고등학생 20명 남짓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당황한 강사를 지켜보고 있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 게임과 야동과 입시지옥의 한가운데서 문학을 꿈꾸는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이 당혹스럽고도 신기로웠다. 학생들의 맑고 진지한 눈동자 때문에 나도 이제 거의 믿고 있지 않는 시의 꿈을 그만 말하고야 말았다. 몇 명 남지 않은 신도들 앞에 터무니없이 큰 소리로 외쳐대는, 우스꽝스럽고 서글픈 교주처럼. "시를 믿사옵니까?"

시는 파산했다. 시가 어디에 서겠는가? 무자비한 시장의 논리가 악마의 맷돌처럼 삶의 모든 양식을 분쇄시키고 있는 곳에, 증오와 불신으로 서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는 이념의 진영 앞에, 막장 서사와 이미지들만이 우글거리는 영상 안에, 빈발하는 충격적인 재난 앞에 유감스럽지만 시의 자리는 없는 듯하다. 더는 아무도 시집을 끼고 다니지 않는다. 소녀의 손에도, 자취방 고학생의 책장에도, 연인들의 속삭임 속에도 시는 닻을 내리지 못한다. 하단 강변의 갈대숲도, 갈대숲에 광활한 노을을 물고오던 새 떼도, 선착장 선술집의 낡은 불빛도, 바다가 밀려오던 동해남부선의 철길도 더는 시 읊조리기를 멈췄다. 시는 거주지를 상실했다.
시가 거주지를 잃어버린 시대는 분명 삶의 깊은 곳 어딘가가 고장 난 시대이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시를 짓는 것은 최초의 귀향"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하이데거가 말하는 '고향'은 삶의 근원이다. 멕시코 시인 옥타비오 파스도 "시는 존재의 심층에 거주한다"고 하였다. 우리에게 돌아갈 고향이 있던가? 시를 잃어버린 것은 생명의 고향을 잃어버린 것이고, 그 삶의 심층 어딘가가 고장 난 것이다. 그리하여 고장 난 삶의 비행기는 불모의 사막에 불시착하게 된다. '어린왕자'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입적하신 법정 스님이 그토록 애독했던 '어린왕자'는 오늘 우리에게 마치 시의 비밀스러운 입문서처럼 다시 다가 온다.

작가 생텍쥐페리는 우리들의 삶이 실패했음을 비행기의 고장으로 암시하고 있다. 그리하여 불시착한 사막은 삶이 고장 난 심층의 지평이다. 그러나 그 지평이야말로 다시 삶이 치유될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좌절의 벼랑 끝이야말로 새로운 반전이 시작될 수 있는 자리이다. 그 자리에서 비행사는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그리던, 그러나 예전에 잃어버렸던 자신 속의 어린이를 다시 만난다. 어린왕자를 만난 것이다. 어른들이 이해할 수 없었던 그 어린이의 언어와 마음이 우리의 고향이며, 시의 정처가 아닐까? 토요일 만난 '청소년 창작캠프'의 초롱초롱한 눈빛은 왠지 내 삶이 불시착한 사막에서 만난 어린왕자 같기만 하다. 어린왕자와의 만남을 통해 마음이 치유되고 비행기의 고장이 수리되는 것처럼, 시를 통해 우리들의 삶도 치유될까?

생텍쥐페리가 어린왕자를 통해 우리에게 말하는 '길들인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다. 수단과 도구와 유용성의 굴레가 되는 관계가 아닌, 관심을 갖고 배려하고 함께 아파하며, 서로가 자유로우면서도 이어지는 관계이다. 시가 하는 일이 본래 그런 일이다. 나와 타자, 사물과 사물이 서로 지배하지 않고 생명의 관계를 맺게 하는 일이다. 시의 손은 모든 것을 황금으로 바꿔버리는 미다스의 손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과 타자를 죽이는 것이다. 시의 손은 모든 것과 감응하고 살리는 오르페우스의 손이다. 바람에 스치는 별과 잎새에 이는 바람과 부끄럼 없는 하늘을 이어주는 일이 시의 은유다. 그리고 함께 괴로워하는 것이 윤동주의 시쓰기다. 그것은 또한 삶의 치유다.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모든 정신적 질병은 이러한 관계의 붕괴에서 발생한다고 했다. 내가 만난 어린왕자들의 눈빛을 생각하며, 나도 다시 시를 꿈꾸어 보는 것이다.

누군가가 오늘밤 시를 읽기 위해 적막한 사막을 떠돌 때 그만큼 우주는 고립과 무감각에서 풀려나 섬세해지고 감응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누군가가 시를 쓰기 위해 온 밤을 뒤척일 때, 우주도 함께 뒤척이게 될 것이다. 누군가 어리석게도 시라는 그 파산한 들녘을 방황할 때, 우주는 조금씩 생명의 파산을 이기고 푸른 춤을 추게 될 것이다. 기어코 생명의 꽃으로 피어날 것이다.

시인

[국제신문 공식 페이스북] [국제신문 인스타그램]
  • 기사주소복사
  • 스크랩
  • 인쇄

 많이 본 뉴스RSS

  1. 1[신간 돋보기] 중견 시인과 청년의 따뜻한 대화
  2. 2내달 개각설…해수장관 후임 하마평
  3. 35G 기반 스마트폰·콘텐츠 모바일 올림픽 총출동…이동통신 미래 본다
  4. 4한국해양대 2.5배 커진 한나라호 위용…대학 실습선 4척 명명식
  5. 5“입사 포기하고 뛰어든 국제 구호활동, 제 삶이 됐죠”
  6. 6동북아 바다…인문학으로 항해하다 <7> 재일제주인의 고향 사랑과 감귤
  7. 7부산공동어시장 임금 체불 피소 위기
  8. 8‘문재인 복심’ 친문 3철(이호철·양정철·전해철), 전면에 나서나
  9. 9부산을 보행친화 도시로 <9> 동래읍성 뿌리길
  10. 10부산과기대 박영희 교수 ‘100대 한식대가’에
  1. 1임시공휴일, 대통령 재가하면 확정…출근 할 경우 수당 체계는?
  2. 2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 4월 11일 임시공휴일 되나?
  3. 3‘문 대통령 깜짝 축사’ 유한대학교, 故 유일한 박사가 설립한 곳
  4. 4전병헌 전 의원 1심 징역 6년 법정 구속 면한 이유는?
  5. 5부산 중구, 대청동 지역사회보장협의체 커뮤니티 케어 교육 실시
  6. 62019년 중앙동 장학회 장학금 수여식 개최
  7. 7부산 중구 (사)중구청년연합회 제28차 회원대회 및 회장단 취임식 개최
  8. 8부산 중구 광복동 주민자치회 2019년도 초등학교 입학생 축하선물 전달
  9. 9부산 중구 제10회 부산크리스마스트리 문화축제 평가설명회 개최
  10. 10‘문재인 복심’ 친문 3철(이호철·양정철·전해철), 전면에 나서나
  1. 1내달 개각설…해수장관 후임 하마평
  2. 25G 기반 스마트폰·콘텐츠 모바일 올림픽 총출동…이동통신 미래 본다
  3. 3한국해양대 2.5배 커진 한나라호 위용…대학 실습선 4척 명명식
  4. 4부산공동어시장 임금 체불 피소 위기
  5. 5사천 항공정비 첫 손님은 ‘제주항공 여객기’
  6. 6부산 주요 기업 창업주들 ‘현역’ 고수하는 속내는
  7. 723년 명맥 유지 ‘2G’ 없어진다
  8. 8동해 바다도 아열대화 진행, 해조류 무게 줄고 종류 늘어
  9. 9아파트값 하락세 연제·남구, 고분양가 관리지역서 해제
  10. 10달걀 산란일 표기 23일부터 의무화
  1. 1경부고속도로 상황 "경찰 차량 통제, 왜?"
  2. 2 차량 통제, 국빈방문 탓… “국빈이 왜 경부선에?”
  3. 3영광여고생 성폭행 사망사건… “90분 만에 소주 3병 마시게… ‘죽었으면 버려라’”
  4. 4현대제철서 용역노동자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 양승조 충남지사 사태파악 지시
  5. 5조현아 남편 상습 폭행 "죽어, 죽어" VS "의혹 전면 부인"
  6. 6김지은 “예상했지만 암담”… 민주원 ’안희정-김지은 텔레그램’ 공개 하자
  7. 75등급 경유차 규제, 내 차 등급 확인법은?
  8. 8부산 연산동 맨션 인근 지름 2.5m 싱크홀 발생… 차량 1대 빠져
  9. 9공공기관 차량 2부제 실시...제외 차량 및 과태료는?
  10. 10 태권도·유도 도합 6단 시민이 편의점 흉기 강도 잡아
  1. 1‘창과 방패 대결’ 유벤투스 VS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예상 라인업은(챔피언스리그)
  2. 2권아솔 도발에 샤밀, "권아솔은 늘 저렇게 말로만"
  3. 3탁구 중국 귀화 선수, 세계선수권 출전 놓고 '엇갈린 희비'
  4. 43쿠션 프로당구 6월 출범 "제2의 이상천, 김경률 배출하겠다"
  5. 5'도전·비상·자부심'…프로야구 각 구단 야심찬 슬로건
  6. 6절정의 손흥민, 데뷔 첫 '5경기 연속골' 도전
  7. 7컬링 '팀킴'의 호소 사실로…김경두 일가, 횡령 정황까지
  8. 8전국체전 무대가 좁은 차준환, 4회전 점프 없이 쇼트 1위
  9. 9경쟁률 4.5 대 1…거인 4·5선발 자리 누가 꿰찰까
  10. 10최고 구속 145㎞, 김원중 첫 실전등판서 구위 점검
부산정치인의 말말말
부산정치인의 말말말-오거돈 부산시장
부산정치인의 말말말
부산정치인의 말말말-박인영 부산시의회 의장
강동수의 세설사설 [전체보기]
새해 개천에서 용이 나려면
1919년 그리고 100년, ‘잡화엄식(雜華嚴飾)’을 꿈꾼다
강동진 칼럼 [전체보기]
농업이 도시로 들어오고 있다
북항은 진정한 부산의 미래가 되어야 한다
기고 [전체보기]
동남권 신공항, 국회의원 역할 절실 /이영
보행도시, 생태적 지혜와 철학 위에서 구현을 /류경희
기자수첩 [전체보기]
‘교양’을 갖춘 사회를 바란다 /신심범
깨지지 않은 ‘서부산 징크스’ /임동우
김용석 칼럼 [전체보기]
‘반려동물’ 수난 시대
‘스마트’하게 살지 않을 권리
김정현 칼럼 [전체보기]
기꺼이 불효를 저질렀습니다
삶의 존엄, 죽음의 존엄
김지윤의 우리음악 이야기 [전체보기]
국악 선입견과 마주하기
제례악에 내포된 음양오행 사상
뉴스와 현장 [전체보기]
엄마 아빠 역할 뒤집기 /하송이
中企를 위한 금융은 없다? /정유선
도청도설 [전체보기]
농기구판 한류
수제화 장인
문태준 칼럼 [전체보기]
자기 표현의 기술
신춘문예 당선 소감을 읽으며
박무성 칼럼 [전체보기]
국민의 눈높이
‘밥 한 공기 300원’의 미래
박상현의 끼니 [전체보기]
포르투갈 리스본의 에그타르트
진화하는 통영 꿀빵
사설 [전체보기]
새 사령탑 맞는 부산비엔날레 새로운 도약 기대한다
30년 만에 육체노동 가동연한 상향한 대법 판결
이상이 칼럼 [전체보기]
노동자 건강과 생명보다 중한 건 없다
생계급여 수급 노인과 ‘줬다 뺏는 기초연금’
이은화의 미술여행 [전체보기]
기절을 부르는 비너스
미술관을 지키는 강아지
이홍 칼럼 [전체보기]
개념도 정리 안 된 ‘4차 산업혁명’
장재건 칼럼 [전체보기]
되살아나는 박근혜의 그림자
보행친화도시로 가는 길
조영석의 음악이야기 [전체보기]
봄이 오는 길목에서
발랄라이카와 닥터 지바고
최태호의 와인 한 잔 [전체보기]
내추럴와인과 정월 대보름
프랑스와 미국의 와인전쟁
황정수의 그림산책 [전체보기]
단발령에서 바라본 금강산
  • 복간30주년기념음악회
  • 어린이극지해양아카데미
  • 유콘서트
경남교육청
클레이아크 김해미술관
해맑은 상상 밀양
걷고 싶은 부산 그린워킹 홈페이지
국제신문 대관안내
스토리 박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