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로마의 원형경기장에선 사람을 잡아먹기 위해 기다리던 사자가 갑자기 경기장을 떠나는 일이 생겼다. 인육식사 전에 긴 연설이 있다는 말을 전해들은 사자가 식사 자체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그 만큼 사자에게도 일방적인 긴 연설은 견딜 수 없는 지루함이었다. 일방적 소통은 우리 주변에 허다하다. 청소년 시기에 다양한 고민으로 인해 한 번이라도 집을 나가고 싶은 생각을 해보지 않은 어른이 있을까? 청소년들이 겪는 답답함과 지루함은 그들이 원하는 자유와 종종 충돌한다. 그 중심에는 부모와 교사로 대표되는 기성세대와의 소통 부재와 더불어 현대 우리 사회의 24시 문화가 자리한 경우가 많다.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이 주장하는 '위험사회'는 오늘의 우리 청소년들에게도 유효하다. 화려한 소비문화는 청소년의 일상을 위협하며 안전하지 못하게 만든다. 원하는 것을 누리려는 청소년의 욕구는 성찰 없이 과감한 집단행동을 시도하게 만든다. 필자가 청소년 관련 연구과정에서 만난 위기에 처한 청소년들에게 학교와 학교 밖 온도차는 격심했다. 이른 아침부터 밤까지 종일 하는 공부와의 씨름을 견디지 못하거나, 부모 혹은 친구와의 관계가 깨어진 청소년들은 가정과 학교를 벗어난 채 안전하지 못한 환경과 24시 문화에 노출되어 있다.
과거 청소년들에겐 집과 학교를 벗어나고 싶어도 쉽게 갈 만한 곳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특히 밤에 청소년들이 갈 만한 곳이 적었고, 그 이전 시대에는 통금까지 있어 밤은 밤새 돌아다닐 만한 시간대가 아니었다. 요즘 우리 청소년은 다르다. 밤은 더는 밤이 아니라 낮만큼 활동 가능한 조건과 환경 덕분에 떼를 지어 쉽게 돌아다닐 수 있다. 그들을 유혹하는 공간은 24시간 내내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도시 구석구석에 현란하게 자리해 있다.
흔히 유럽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알찬 여행을 위해 밤에도 많은 것을 구경하고 싶어하지만 오후 6~7시가 되면 상점이 거의 문을 닫는 바람에 더는 구경할 만한 곳이 없다. 한때 관광객 유치를 목적으로 폐점시간을 연장한 나라도 있었지만 다시 원래의 시간으로 되돌린 나라도 있다. 그런데 이게 정상적인 삶이 아닐까. 일하는 사람도 관광객도 밤엔 쉬며 잠을 자야 다음 날 다시 여행을 계속할 수 있지 않은가. 이 단순한 원리가 우리 사회엔 아직 적용될 틈이 없어 보인다.
현대인의 편의와 경제활성화 목적으로 24시간 운영되는 수많은 종류의 상점들, 이용자든 운영자든 인간의 밤낮의 바이오리듬이 깨진다면 장기적으로 국민건강을 기대하기 어렵다. 결국 24시라는 이름을 건 채 기성세대는 청소년들에게 위기의 조건을 앞서서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호기심 가득한 청소년들에게 도시의 밤은 갈 만한 곳이 즐비하다. 심지어 24시간 노동현장엔 청소년의 아르바이트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위기의 조건은 훨씬 더 다양해진다.
위기에 처해 있는 청소년들은 누군가와 소통하고 싶어한다. 흔히 정체성 혼란을 겪는 청소년 시기엔 부모, 교사, 또래 등 다양한 관계를 통해 인격이 형성되어 간다. 그러나 이들은 진정한 소통의 부재로 인해 방황하고 있다. 청소년들이 원하는 소통방식은 의외로 단순하다. 자신이 흔들릴 때 끝까지 잡아줄 누군가를 찾는 것이다. 많은 청소년들은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소통할 상대를 찾지 못한 채 가정과 학교 밖에서 다른 유형의 위험한 소통을 시도 중이다. 수많은 기관의 청소년 상담사, 지도자, 상담교사가 헌신적으로 애를 쓰고 있지만 청소년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환경과 문화는 안전하지 못하다.
국민 전체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 국가 차원에서 내려야 하는 조치는 항상 존재한다. 성인이 보호하고 안전을 책임져야 할 청소년인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가정과 학교를 떠나 있는 청소년을 돕고 있는 기관실무자, 상담자들의 현장 목소리에 지금보다 훨씬 더 귀 기울여야 한다. 그들의 숨은 노고와 헌신으로 위기에 처해 있는 수많은 청소년들이 회복되는 과정에서 필요한 것들을 해결해 주어야 한다. 더 나아가 3세 이하 영·유아 대상 TV 광고모델 금지, 오후 8시 이후 방송의 '자살' 단어 사용금지를 결정하는 프랑스와 영국과 같이 아동과 청소년을 안전하고 건강하게 지켜내려는 국가 차원의 성찰과 결단이 필요하다. 24시간 경제활성화가 청소년에게 미칠 영향을 반드시 짚어보아야 한다.
부산여성가족개발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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