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부산메디클럽

[인문학 칼럼] 맹자가 옳았다 /이성희

맹자는 잘라 말했다 "왕에겐 이익이 아닌 인의가 있을 뿐이다"

이윤이 최고가치일 때 사람의 가치는 최저다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4-06-05 00:20:39
  •  |  본지 31면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주소복사
  • 스크랩
  • 인쇄
  • 글씨 크게
  • 글씨 작게
   
나는 맹자(孟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처음 '맹자'를 읽었을 때, 그 첫 대목의 인상 때문에 그 후로 맹자와는 별로 잘 사귀지를 못했다. 그것은 맹자가 양나라에 와서 혜왕과 만나는 장면이었다. 그때 맹자는 50세쯤이었으니 학자로서는 절정의 시기였으며, 양나라 방문은 왕도정치의 꿈을 품고 떠난 그의 첫 유세였다.

반면 양혜왕은 81세였다. 그런데 여든의 왕이 오십 줄의 한갓 유세객을 '수(叟)'라고 부른다. '수'는 '노인장'이나 '선생'에 해당하는 존칭이니 이 정도면 노회한 제후가 맹자를 나름 섭섭지 않게 대접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양혜왕이 묻는다. "선생께서 천리를 멀다하지 않고 찾아오셨으니, 또한 장차 우리나라에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이권과 탐욕의 시대, 너무나 익숙한 질문에 맹자는 어떻게 대답하였던가. 짧은 대답 속에 맹자의 전 공력이, 필생의 염원이 담겨 있었음을 그때는 몰랐다. 맹자의 대답은 이러했다. "왕께서 하필이면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오직 인의(仁義)가 있을 따름입니다(亦有仁義而已矣)." 이 짧은 대답이 맹자가 시대를 향해 처음으로 외친 사자후이다. 여기에서 맹자는 '∼할 따름이다'에 해당되는 단정적 종결사인 "而已矣"를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가장 단호한 단정이어서 그때 맹자의 어조를 사뭇 짐작게 한다. 한때 천하를 호령하며 '왕'이란 칭호를 처음으로 참칭했던 야심가, 그러나 이제는 나라가 점차 쇠망해 가는 것을 깨닫고 있던 한 늙은 제후의 간절한 소망을 맹자는 단 한마디로 칼처럼 잘라버린다, 단호하게. 너무 야박하고 차가운 지성이라는 느낌을 그때 지울 수 없었다. 그렇게까지 말할 거야 있나?

그러나 맹자가 옳았다. 오늘에야 그 단호함이 옳았음을 깨닫는다. 세월호 참사 뒤에 얽혀 있는 탐욕의 거미줄을 보고서야 말이다. 오직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상하 종횡으로 영합하고 야합하고, 이권으로 결탁된 그 견고하고 무시무시한 돈과 권력의 검은 카르텔을 우리는 보았다. 맹자가 참으로 염려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맹자야말로 백성에게 일정한 생업의 경제적 이익을 제공하는 것이 도덕적 요구보다 우선함을 역설했던 사람이 아니던가. 그런 그가 양혜왕의 '이익'을 단칼에 베어버렸다. 맹자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왕의 요구, 즉 이익이 사회의 중심 가치가 되는 순간, 그것은 파멸로 가는 편도의 차편이 된다는 것을 말이다. 맹자의 말은 이어진다. "왕께서 어떻게 하면 내 나라에 이로울까 하시면 대부들은 어떻게 하면 내 집에 이로울까 하며 선비나 백성들은 어떻게 하면 내 한 몸에 이로울까 하여, 윗사람 아래 사람이 서로서로 이익만을 취하게 되니, 그렇게 되면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그 동안 우리 사회의 최고 정치지도자들은 공공연히 기업친화 정책기조를 표방해왔다. 그것이 그들의 정치적 이권과 어떻게 연관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바탕에는 신자유주의의 브레이크 없는 탐욕이 깔려 있다. 그들은 그 요동치는 탐욕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는 셈이다. 기업이란 최대한의 이익을 창출하고자 하는 이윤추구 시스템이다. 이윤이라는 하나의 목표가 설정되면 나머지는 모두 그것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
이러한 기업 경영의 시스템이 우리 삶의 시스템이 되고 냉혹한 시장의 가치가 우리 사회의 가치 표준이 될 때, 그것에 결탁하여 지도자가 이익을 외칠 때,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 아이들의 생명을 어두운 위험 속에 방치해야 한다. 서로 공경하고 서로 보살피는 따뜻한 삶을 포기해야 한다.

자본주의를 근대적 합리화의 긍정적 과정으로 보았던 석학 막스 베버조차도 이렇게 말했다. "시장은 자체의 고유한 법칙성에 내맡겨져 있는 곳에서는 오직 사물의 명색만을 알 뿐이지 사람의 명색도 알지 못하고, 우애의 의무와 공경의 의무도 알지 못하며, 사적인 공동체들에 의해 유지되는 원초적인 인간적 관계들도 알지 못한다."('경제와 사회') 섬뜩한 통찰이지 않은가.

경제적 성장과 이익을 포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정치경제학자 칼 폴라니의 비유처럼 이윤만을 추구하는 시스템으로 작동하는 시장은 '악마의 맷돌'과 같다. 그 속에서 이윤이 가지는 자장은 너무나 강력해서 모든 것을 빨아들여 갈아버린다.

우리는 적어도 이 자장을 완화시킬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인간의 가치로 보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이, 그리고 생명이 먼저다. 도대체 생명과 평화가 위협받는다면 우리들의, 우리 아이들의 행복이 경제적 숫자 어디에서 숨 쉴 수 있단 말인가. 착한 자본주의, 인간의 얼굴을 한 시장이 될 수는 없는 것일까? 그렇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도 맹자처럼 단호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오직 생명과 인간이 있을 따름입니다." 그것이 설령 지나치게 단순한 단정일지라도.

시인

[국제신문 공식 페이스북] [국제신문 인스타그램]
  • 기사주소복사
  • 스크랩
  • 인쇄

건강한 부산을 위한 시민행동 프로젝트
많이 본 뉴스 RSS
  • 종합

  • 정치

  • 경제

  • 사회

  • 스포츠

부울경 국회의원에 듣는다
민홍철 국방위원회 민주당 간사
부울경 국회의원에 듣는다
이채익 행안위 한국당 간사
걷고 싶은 부산 그린워킹 홈페이지
국제신문 대관안내
스토리 박스

무료만화 & 게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