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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웰빙에서 종북으로 /김갑수

박근혜 정부 1년…유행어는 '종북', 국민 절반 속하니 나도 편승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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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3-12-11 20:35:39
  •  |  본지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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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어 속에 그 시대가 보인다. 웰빙의 시대가 있었다. 인문적 가치 이전에 몸의 욕망을 최대치로 구가하고 보자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잘 먹고 잘 살자'는 말이 세간의 유행어라면 꽤 살 만한 시절이다. 그때 우리는 히딩크의 월드컵, 남북정상 간의 포옹과 놀라운 한반도 미래구상을 즐겼다. 신념이 다른 사람은 현직 대통령을 마음껏 비판하고 조롱도 할 수 있었고, 공중파 방송마다 경쟁하듯 토론과 시사고발 프로그램을 확대했다. 어떤 말이든 공개적으로 할 수 있었는데 다들 그것을 당연한 일인 양 여겼다. 한반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이래 우리 경제가 가장 높은 국제 경쟁력을 보였던 시절이기도 했다. IMF 위기를 넘어서고 1인당 국민소득 2만 불을 달성했을 때 주요 선진국들도 3만 불을 갓 넘겼다. 2012년 기준으로 세계 1위 룩셈부르크가 10만 불을 넘었고 미국 5만 불, 일본 4만6000불인 오늘날과 비교하면 그때 우리가 떵떵거렸던 것이 허장성세가 아니었다.

웰빙 시대에 필자의 주된 활동무대는 신문지면이었다. 대부분의 신문이 전폭적으로 북 섹션을 신설 혹은 증설해 신간을 소개했는데 밀려드는 서평 원고청탁으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사람들의 일상대화도 책을 통한 것이 많아서 문득 우리에게도 선진사회 특유의 교양층이 형성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정치면 못지않게 문화면 기사가 화제의 중심으로 떠오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 같이 책을 논하는 인기 블로거들도 속속 등장했다. 누가 일부러 키운 적도 없건만 너도나도 웰빙을 탐하던 시절이었다.
웰빙은 순식간에 저물었다. 시장주의 정권이 들어서고 국제 금융위기가 도래하고 무자비한 경쟁에서의 승리와 생존이 최대가치로 등장하자 웰빙을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되었다. 그 대신 상처받고 갈 곳 없는 청년층, 이른바 88만 원 세대를 향한 힐링이 시대의 유행어가 됐다. 곧장 힐링의 언어는 전 세대, 전 계층으로 확대됐다. '아프니? 나도 아프다'라든지, '중생이 아프니 나도 아프다'를 너나없이 입에 올렸다. 갑작스레 그 아픔을 심리적으로 치유하고 위로한다는 부흥사들이 스타로 부상했다. 반면에 왜 아픈지, 그 아픔을 누가 어떻게 조장하는지 따지고 드는 사람들에게는 '좌파'라는 낙인이 찍혔다. 진보, 보수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사회적 언어로서 세대갈등과 계층성, 지역성을 규명하는 데 유용했지만 좌파, 우파는 1990년대 이래 현실 사회주의가 소멸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사라진 이념용어였다. 그런데 힐링을 불러온 이명박 정부가 비판자 제어용으로 느닷없이 재활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권력의 부조리를 비판하는 모든 사람은 한국사회에서 '빨갱이'를 함의하는 좌파로 저도 모르게 분류됐다. 그 많던 방송 토론 프로그램, 신문 북섹션은 추풍낙엽처럼 사라지고 문화면의 관심은 연예·오락 기사로 대체됐다. 힐링 부흥사들만 엄청나게 돈을 벌었고 정치리더로까지 부상했다.

이제는 웰빙도 힐링도 사라졌다. 바로 엊그제 같은데 그 유행어의 울림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대신 박근혜 정부가 등장한 1년 내내 모든 매체를 뒤덮은 단어는 '종북'이었다. 세계 최빈국의 새파랗게 어리고 미련해 보이는 독재자를 누가 추종하느냐고 어이없어해도 소용이 없다. 후진국 독재체제로 전락하는 것을 뜻하는 국가기관의 선거개입을 비판하면 '종북이니까 북한으로 가라'고 명령한다. 압력밥솥이나 등산은 내란음모가 되고 신부의 미사 강론은 혁명투사의 선동으로 불린다. 종북은 너무도 효율적이고 강력한 언어여서 모든 토론, 다채로운 관점을 다 뒤덮어 버린다. 이제 한국인은 종북자와 애국보수 딱 둘로만 나뉜다. 조국 근대화의 위대한 영도자이신 '아버지 대통령 각하'의 거대한 동상에 경배할 마음이 없거나 레이디 각하의 정치적 책임을 거론하면 모두 종북이다. 각하의 아름다운 한복패션이나 놀라운 외국어 실력에 탄복하지 않으면 종북이고, 65조 달러에 달한다는 북한의 희토류 자원개발을 위한 남북교류를 아쉬워하면 종북이다. 다만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종북이 소수 외톨이는 아니라는 점이다. 48퍼센트 득표한 대선 후보도 종북이고, '민중'도 종북이라면 국민 절반쯤은 종북이다. 유행에 편승하는 심리는 편안해지자는 것. 이제 나도 각하의 국가에서 종북을 자임하련다.

시인·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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