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주간 한일관계를 논하는 회의에 연이어 출석하였다. 양국의 정계, 경제계, 학계의 주요 인사들이 참석한 이들 회의는 최근 악화일로에 있는 한일관계를 반영하듯 예년과는 확연히 다른 긴장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회의의 말석에 참석하면서 최근 양국관계는 3개의 차원에서 큰 충돌이 진행 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는 양국 정부정책 간의 충돌이다. 박근혜정부는 '가해자' 일본이 먼저 '신뢰'를 보여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지금과 같은 아베 정부의 '막무가내식' 우경적 언동이 계속되면 불신만 쌓일 것이고 그래서는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반면 아베 정권은 한국에 대해 이미 상당한 '성의'를 표했다는 주장이다. 아베 총리 자신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단념, 과거사를 반성한 '무라야마 담화'의 계승 천명 등은 한국을 배려한 노력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일본의 '성의'가 한국이 원하는 '신뢰'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더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라며 항변하고 있다.
두 번째는 양국민 차원의 감정적 충돌이다. 과거를 잊으려하는 일본에 대해 한국민들은 분노하고 있다. 국내 언론의 헤드라인은 반일 일색이고, 일본에 대해 조금이라도 우호적인 기사는 격한 댓글의 표적이 되고 있다. 일국민들의 한국에 대한 불만 또한 과거와는 매우 다른 양상이다. 인터넷상에서의 반한적 표현은 이미 도를 넘고 있다. 급기야 일본 내 친한파 인사들조차 한국에 대해 최근 비판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세 번째는 기존 체제의 충돌과 붕괴 조짐이다. 지금껏 한일양국 관계를 지탱시켜온 버팀목은 1965년에 맺은 한일협정이다. 협정 체결 당시 국내에는 계엄령이 내려질 정도로 격한 반대운동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정권의 경제발전 우선 정책과 미국의 한일국교 정상화에 대한 강력한 요구, 그리고 일본의 식민지 피해 문제 조기청산이라는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협상이 타결되었다. 일본의 한 저명 학자는 한일협정은 양국 간 '화합'의 산물이 아니라 이해 당사자 간 '타협'의 산물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최근 이 협정에 대한 도전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2011년 헌법재판소는 한일협정 협상 당시 종군위안부 문제를 다루지 않은 정부의 부작위는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올해 7월 부산고법은 일제강점기 강제노동피해자에 대해 미쓰비시사는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식민지피해에 대한 배상이 65년 협정으로 모두 해결되었다고 천명한 한일양국 합의체제에 대한 붕괴를 예고하는 것이다. 이와는 별도로, 일본의 경우 전후 일본을 지탱해 온 평화헌법 체제를 종식시키려는 시도가 진행되고 있다.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헌법해석을 수정하려하고 있고, 국방군 창설을 위한 헌법개정을 주장하는 등 소위 '보통국가' 체제로의 이양을 추구하고 있다. 이렇듯 전후 양국관계를 지탱해온 두 개의 체제가 붕괴 수순에 접어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우려가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세 가지 차원의 충돌이 좀 더 심화되면 양국민 간에 집단불화라는 심각한 상태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때 필요한 것이 아마도 '넛지'의 지혜일 것이다. '넛지'(리처드 탈러 등, 2009)란 팔꿈치를 툭 치는 정도로 주의를 환기시키고 '부드러운 개입'으로 어떤 행동을 유도한다는 의미이다. 즉, 타성의 힘에 의해 일방적으로 흘러가는 상황을 '얼핏 사소해 보이는 변화전략'을 구사하여 '방향을 현격하게 변화시키는 요소'를 말한다. 격한 부부 싸움을 하는 와중에 어느 한쪽이 먼저 툭 치면서 우스꽝스러운 몸짓을 취하면 분위기가 삽시간에 좋아지는 경우가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마침 9월과 10월에 G20 정상회의와 APEC 정상회의 등이 줄줄이 예정되어 있다. 한일정상이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기회이다. 어려움이 있더라도 일단 양국정상이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후에 '넛지'의 지혜를 모아 양국관계가 빠른 시일 내에 복원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외교적 창의성을 발휘해야 한다. 너무 요란한 반목이 오래가면 양국관계에 깊고도 깊은 골이 파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웬만한 '넛지'로는 약발이 먹히지 않는 상황에 빠진다. 어려운 문제를 풀기 위해 외교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 아닌가.
동서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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