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반 한국조폐공사 측이 화폐위조방지 은선기계를 수입하면서 기계조작 현장교육을 위해 독일의 작은 시골 웰링하우젠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곳은 필자가 유학했던 도시로부터 멀지 않은 인구 2만~3만의 작은 시골이다. 변변한 호텔 하나 없어 조폐공사 직원들은 필자가 있었던 도시에 숙소를 정했다. 어떤 이유로 학생기숙사로 직원들이 와서 저녁 식사를 함께 하던 중에 불평이 시작되었다. 요지는 하필 시골에 회사가 있는 바람에 비록 공무차 왔지만 다른 것은 아무것도 경험하지 못하고 간다는 것이었다. 불평 속엔 놀라운 사실이 숨겨져 있었다. 작은 시골의 한 중소기업이 세계를 상대로 첨단 화폐위조방지 은선기계를 만들어 팔고 있다는. 우리의 인식 속엔 이 정도 기업이면 수도 베를린에 자리해 전 세계 고객을 근사하게 맞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중소기업은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작은 시골에 실속있게 자리하고 있었다.
독일의 지역균형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중소기업 분야에서 구체적으로 체험하는 계기가 됐다. 지역균형은 기업의 지역 유치뿐만 아니라 인재선발에서도 나타난다. 그곳 전문가는 주변 전문대를 졸업한 기술자로서 기계를 직접 만들고 세계를 대상으로 무역을 하고 있었다. 또 대학은 자대 출신 박사학위자를 5년 이내 교수로 채용할 수 없도록 제도화해두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인재가 전 지역에 두루 섞이도록 하기 위한 방안이다. 중앙공항은 수도 베를린도, 통독 이전의 수도 본도 아닌 지형상으로 가장 중심에 있는 프랑크푸르트에 있다. 그래서 유럽 여행객들에게 프랑크푸르트는 베를린만큼이나 유명하다. 독일을 한 번쯤 여행한 사람들은 도시규모에 상관없이 몇 곳만 다녀도 지역 간 균형 잡힌 삶의 질을 경험한다. 그만큼 독일은 지역균형을 철저하게 고수하는 나라다. 이러한 지역균형은 지역을 살릴 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 다양한 도시브랜드를 만드는 기초가 된다.
우리의 수도 서울은 이미 과밀 상황이다. 인구밀도가 높은 우리나라에서 분배의 원칙은 국가균형발전에 중요한 기능을 한다. 그런 점에서 아쉽다. 단순히 중앙과 제2도시 부산 간의 비교에서 아쉬운 것이 아니라, 국내 여행지를 다녀보면 지역 간 상대적 격차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지역균형은 종종 동일한 것을 놓고 경쟁하는 방식이다. 지역을 대표하는 축제든 대형사업이든 천편일률적이어서 지역성을 살리는 데 미진하다. 타인이 가졌기 때문에 나도 동일한 것을 가져야 한다는 단순한 사고는 지역균형에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 지역균형은 어느 지역에 살든 삶의 질이라는 동일한 결과를 얻으려는 것이지 닮은꼴 콘텐츠를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뭐니뭐니해도 부산은 부산국제영화제, 동북아시대 해양수도 등으로 도시브랜드를 고양하는 중이다. 해양도시가 지닌 특색과 가능성을 살려나가야 한다. 베를린 영화제, 뮌헨 맥주축제, 프랑크푸르트 메세처럼 지역마다 그 지역을 가장 잘 브랜드화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해야 한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는 집요하리만큼 모차르트를 브랜드화해 관광 상품화하였다. 부산도 지금 한창 단장 중인 시민공원을 뉴욕의 센트럴파크처럼 상징화하고 시민의 진정한 안식처로 만들었으면 한다. 이제 흉내 내기에서 벗어나 부산지역 나름의 지역성을 발견할 때이다.
진정한 시민 삶의 질은 생활터전이 어디든 상관없이 기본적으로 삶의 조건들이 보장되어야 한다. 우리의 중앙 중심주의는 경제, 교육, 문화 등 그 격차를 좁히지 못한 채 이젠 지역의 인재마저 오직 중앙으로 몰리게 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선 '인 서울' 하지 못하면 마치 낙오자가 된 듯한 분위기이다. 지역 살리기는 구호만 내건 채 근본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독일의 지역균형 정책을 거울삼아, 국가 기간산업과 정부부처의 고른 지역 분배 배치를 위한 정책 수립과 집행이 필요하다. 내년이면 특별법에 따라 부산으로 이전해오는 수도권 공공기관들이 있다. 정부의 이런 노력이 초석이 되어 어느 지역에 살든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균형잡힌 삶의 질이 보장되어야 한다. 진정한 지혁균형은 이제 겨우 시작되는 양적 분배에 질적 분배까지 고려할 때 가능하다.
부산여성가족개발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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