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을 주제로 한 초등학교 공개수업에서 딸 아이가 우리 가족을 소개했다. 아이는 엄마, 아빠, 자신 다음으로 평소 무척 아끼던, 방과 후 유일한 친구였던 물고기 30여 마리를 가족에 포함시켰다. 물고기는 가족일 수 없다는 선생님의 부동의에도 맞벌이가족의 빈 공백을 메워준 물고기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딸의 소중한 가족이었다. 언어로 소통할 수 없는 물고기도 간절한 누군가에겐 가족이 될 수 있건만, 소통하며 살아야 할 현대의 가족은 정작 소통할 시간과 여유를 잃어버리고 산다. 톨스토이는 그의 책 '세 가지 질문'에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때, 가장 중요한 사람, 가장 중요한 일에 대해 질문한 후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로 답하고 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내 곁에 있는 가족이며,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내가 해결해야 하는 생애과업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현대의 가족은 너나 할 것 없이 생애과업과의 전쟁으로 지쳐 있다. 10대는 학업과 진학, 20대는 일자리, 30대는 결혼과 양육, 40대는 직장 내 승진, 50대는 이른 퇴직, 60·70대 이상은 노후대책과 건강으로. 전 세대가 각자의 전쟁터에서 불안한 삶을 산다. 그런 가운데 척박한 서로의 일상을 동병상련해주지 못하고 있다.

이 모든 버거운 전쟁에도 하루의 일과를 접고 보금자리를 찾아 쉬다가 내일의 태양을 불러들이는 가족의 힘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단지 가족의 이름으로 한 지붕 아래 한솥밥을 나누며 부대낀 결과인가. '가족은 아무런 조건 없이 서로가 잘되길 바라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어느 책에서 가족을 정의한 대목이다. 조건 없이 잘되길 바라는 것, 바로 이것이 가족의 힘이 아닐까? 이 시대는 경제적인 이유 등으로 가족을 구성하기 어렵게 되었고 맺어진 가족의 구성마저 다양해졌다. 맞벌이 주말부부 기러기 가족은 가족구조를 대표한다. 한부모 미혼모 노인 조손 무자녀 가족은 가족구성원의 변화를, 다문화 입양 재혼 가족 등은 생활양식의 변화를 말해준다. 이젠 1인 가구라는 새로운 가족형태까지 등장한다. 이 시대 누가 감히 엄마와 아빠, 딸과 아들로 구성된 가족만을 말할 수 있을까? 전통적인 가족이데올로기가 자리할 곳은 어디에도 없다.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정책이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다양한 가족이 우리를 이웃하고 있다. 무엇보다 우린 다양한 가족형태를 선입견 없이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종종 한부모 미혼모 다문화 가족을 향한 특정한 시선은 그들의 삶을 불편하고 불행하게 만든다. 다양한 배경의 가족들이 자신의 소중함을 느끼며 사회에 잘 적응하도록 우리 모두는 마음을 열어야 한다. 또 제도적으로는 다양한 가족형태에 맞추어 세대 통합, 상호 문화 이해의 과제를 가족정책에서 풀어가야 한다. 정책의 개발, 입안, 집행 과정에서 각 세대에 부합하는 정책이 물 흐르듯 연결되어야 한다. 결국 가족정책은 다양한 가족형태를 수용하면서 가족구성원이 속한 세대별 생애과업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수립되어야 한다.

다양한 가족형태는 급변하는 사회의 바로미터이다. 1인 가구가 살 만한 초미니 주택이 건설될 만큼 의식주 등에 새로운 생활양식과 문화, 소비 행태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또한 정년연장 정책을 두고 20대와 50·60대의 갈등, 정치적 영향력을 대변하는 세대 간 의견차이 등이 가족에게 미치는 영향을 더는 과소평가할 수도 없다. 가족이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할 때 그로 인해 파생되는 숱한 과제를 사회는 떠안아야 한다. 위기 청소년, 노인의 빈곤, 돌봄의 문제 등. 어떠한 형태의 가족도 정책의 대상으로 수용되어야 하며 보호받아야 할 권리를 가진다. 이제 가족은 더는 과거의 가족이 아니다. 새롭게 형성되는 가족 개념과 가치에 대한 이해와 수용이 필요하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가정의날 입양의날 부부의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가족을 끌어안은 5월, 다시 한번 가족의 이름과 힘을 강조할 수밖에 없다. 가족의 저력을 발휘하여 지친 가족을 일으켜 세울 때이다. 내 가족뿐만 아니라 다른 모습의 가족까지도 함께 살아야 할 나의 이웃임을 아무런 '조건 없이' 인정했으면 좋겠다. 적어도 가족의 구조, 구성원, 가치관, 생활양식 등의 차이로 인해 가족은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 건강한 가족은 건강한 사회의 출발점임을 잊지 말자.

부산여성가족개발원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