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로 계약(contract)이라는 단어는 '함께'를 뜻하는 con과 '길' 또는 '통로'를 의미하는 track의 합성어인데 '함께 가는 길' 정도로 의역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계약은 '함께 지키기로 한 약속'을 의미한다. 약속이란 밀고 당기는 협상 끝에 나온 산물로서 앞으로 지켜나가겠다는 신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1994년 미국 의회 선거 때 공화당은 뉴트 깅그리치 원내총무를 중심으로 작은 정부와 균형예산 등을 표방한 8대 개혁과제와 10개의 법안을 발표하고, 다수당이 되면 이를 반드시 실천하겠다며 공화당 공천 후보 367명 전원이 국회의사당 앞에 모여 '미국과의 계약(Contract with America)'에 서명한 바 있다. '미국과의 계약'이다 보니 당선 후 딴소리를 하지 못하게 되었고,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공화당은 임기 내내 민주당을 집요하게 설득하고 회유해서 상당한 성과를 일구어내었다. 많은 역사가들은 이 계약에 대해 "국가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효율적인 포뮬러를 제공하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이제 '대한민국과의 계약(Contract with Korea)'이 필요한 때가 된 것 같다. 국가균형발전을 위해서 말이다. 사실, 오늘날의 휘황찬란한 서울과 수도권이 있기까지는 지방의 크나큰 희생이 있었음은 누구도 부인 할 수 없다. 전쟁의 폐허에서 벗어나서 하루빨리 선진국 반열에 오르기 위해서는 우선 서울을 집중 발전시켜야 한다는 중앙정부의 정책이 있었고, 이를 암묵적으로 받아들인 지방과의 애국적 '계약'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1980년대 공공투자 규모를 보더라도 총예산의 약 40%를 수도권에 퍼부었다. 좀 더 실감 나는 숫자를 들어보자.
인천국제공항을 건설하는 데 총 7조8078억 원이 투입되었는데, 이는 비슷한 시기 지방에 투자된 남강댐, 용담댐, 새만금방조제 사업을 모두 합한 금액의 두 배가 넘는 규모였다. 또한, 지역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할 수 있는 국가 R&D 사업예산도 2009년 총사업비의 41.4%인 4조7370억 원이 수도권에 집중되었고, 나머지가 지방에 '코끼리 비스킷' 나누듯 흘러들어 갔다. 시민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문화 방면의 희생은 더 심각하다. 2010년 문화진흥기금의 경우 예산 729억 원 중 수도권에 71.6%인 522억6000만 원이 집행된 반면, 제2의 도시 부산에는 26억5000만 원으로 전체 3.7%에 불과하였다. 이렇게 모든 예산이 수도권 중심으로 짜이다 보니, 지방수장들은 지역 일은 제쳐두고 서울 나들이가 잦아질 수밖에 없다. 한 조사에 의하면, 부산지역 기관장들의 75%가 예산 확보를 위해 매주 1, 2회 서울 출장을 다녀온다고 한다.
이제 '수도권 우선 개발, 지방 희생'이라는 애국에 바탕을 둔 '암묵적 계약'은 그 실효를 다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애초 그 계약에는 우선 수도권을 발전시킨 후에는 지방 발전에 심혈을 기울인다는 '이심전심'의 단서조항이 달려있었다는 점이다. 계약인 이상 지켜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노무현 정부 때 '지역균형발전'이라는 정책을 화두로 해서 수도기능의 세종시 이전 그리고 공공기관의 인위적 지방배치가 있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지방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낮았다. 이달 말에 탄생하는 박근혜 신정부의 지방정책은 과연 무엇일까에 대한 지역민들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말하자면, 지역정책이 정권에 따라 널뛰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지역균형발전을 매번 정권의 정책 방향에 목을 매는 구조를 청산하지 않으면 지속가능한 지역발전은 지난하다. 중앙정부의 시혜를 서로 많이 받으려고 지역 간 사활을 건 경쟁을 하다 보니 지역감정의 골도 패일 대로 패이고 있다. 매년 국회예산심의 때 자신의 지역구 예산만을 챙기겠다고 '쪽지'가 난무하는 기현상은 참으로 부끄러운 우리의 자화상이다.
이제 지역발전을 위한 '대한민국과의 계약'이 필요할 때이다. 대통령, 정부, 국회, 지방자치단체가 모여앉아 지역균형발전에 대한 향후 20년 계획을 머리를 맞대고 도출해 내고, 정권이 바뀌더라도 지속하겠다는 굳은 약속을 해야 한다. 언젠가 국민이 뽑은 대표들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모여 지역발전을 위한 '대한민국과의 계약'에 서명하는 장면을 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간절하다.
동서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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