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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숲길] 뒤끝 있는 사람 /배유안

윗사람의 뻔뻔함 사회 곳곳에 상처…'선택의 날' 임박, 유권자 뒤끝 필요

  • 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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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2-12-07 19:22:03
  •  |  본지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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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어느 학교에 작가 강연을 하러 갔을 때였다. 프로그램 휴식 시간에 담당 교사가 학생들에게 '나는 누구인가? 왜냐하면…' 이라는 문제에 은유로 대답해보자는 과제를 내주며 '나는 가시 돋친 고슴도치이다. 왜냐하면 친구에게, 엄마에게 늘 상처 주는 말을 한다' 등 몇 가지를 예로 들었다. 최근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거나 자신이 지향하는 모습을 생각해보게 하는 과제였다. 흥미로운 마음에 나도 잠시 학생이 되어 답을 탐색하다가 강연은 계속되었고, 학생들의 답은 다음 프로그램에서 공개될 예정이라 내가 읽을 기회는 없었다. 아이들은 자신을 어떻게 돌아보았을까를 궁금해 하며 집에 돌아와서도 간간이 나의 답을 생각해보다가 결국 찾았다. '뒤끝 있는 사람'.

사람 사이에서 마음 상한 일이 있을 때에 그걸 오래 담아 두는 게 부끄러웠던 때가 있었다. 그걸 털어내지 못해 관계가 서걱거리고 속 좁은 사람이라는 자책까지 오면 이래저래 일상이 쾌적하지 못했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뒤끝'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과 관찰이 많아졌다. 어느 날, 나를 몹시 난감하게 한 친구에게 그 불편함을 이리저리 내색하다가 결국 터놓고 말을 했는데 돌아오는 말이 '난 뒤끝 없다'였다. 뭘 아직도 그거 갖고 이야기하느냐는 거였다. 사건을 일으킨 쪽에서 태연히 던진 말의 충격은 컸다. 그러잖아도 오래 전, 누군가에게 닦달을 실컷 당하고 나서 '그래도 나는 뒤끝은 없다'며 선심을 쓰는 말에 크게 상처 받은 적이 있어서 '뒤끝 없다'는 단어의 횡포를 알고 있던 차였다. 그날, 친구의 태연한 말 덕분에 '뒤끝'의 역할과 함께 뒤끝이 있을 자리가 어디인가에 대한 답을 찾았다. 그리고 문제를 없애기보다는 문제를 소리 없이 키워가는 방법이었던, 좋은 게 좋다는 두루뭉술한 태도를 버리고 제대로 뒤끝이 있기로 했다. 속 좁다는 말을 들을까 하는 괜한 걱정은 버렸다. 좁을 곳에는 좁아야 하는 것이 사람속이다. 결국 가까울수록 더 그때그때 화를 표현하고 뒤끝을 함께 푸는 게 여러 모로 나았다.
이제 나는 뒤끝 품을 곳을 나름대로 분별하여 당당하게 품고 더는 부끄러워하지 않게 되었다. 뒤끝을 쓸모 있게 바꾸어 내 삶의 방식에 끌어들인 셈이다. 나 자신에 대해서는 더 많이 뒤끝이 있기로 했다. 어제 저질렀던 과한 수다, 어쭙잖은 자랑질, 그 전날 딸에게 저질렀던 습관적 지적질에도 뒤끝을 오래 가질 것이다. 내 인생을 게을리 했던 책임은 끝까지 물을 것이고, 무심하게 흘려보낸 젊은 날의 아까웠던 시간에 대해서도 내내 사과할 것이다. 또, 사려 깊지 못한 탓에 가까운 사람들에게 준 상처는 두고두고 갚을 것이다. 너그럽지 못해 베풀지 못한 사랑은 몇 배로 돌려줄 것이다. 이 '뒤끝'은 현재의 나를 단단히 추스르는 힘이 될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행복이 되고 있다.

사실, 뒤끝이라는 말은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거라면 아주 긍정적인 단어이다. 그건 과거의 실책을 오래 잊지 않는다는 것이기도 하고, 책임 있는 자에게 책임을 물어 방만함과 무책임이 습관이 되지 않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뒤끝 있을 자리, 뒤끝을 털어낼 주체가 뒤바뀐 게 얼마나 많은지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아랫사람에게 폭언과 압박을 준 윗사람들의 이상한 뒤끝 없는 태도는 우리 사회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수많은 인명 피해를 준 사회 정치적 사건의 주역이면서 뻔뻔하게 뒤끝 없는 사람도 있고, 범죄적 권력을 휘두르고 뒤끝 훌훌 털어버리는 일들이야 오랫동안 자주 봐 왔던 일이다. 상처 받은 사람들이 오히려 쓰린 뒤끝을 가슴에 잠재우는 것으로 문제에 대한 해결 아닌 해결을 해 왔던 게 얼마나 많았으며 지금도 많은가? 그래서 상처 받는 자는 자꾸 상처 받고 상처 주는 자는 자꾸 상처를 주는 일이 되풀이 되고 있는 건 아닌가 싶다. 이제 뒤끝을 가져야 할 사람들이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뒤끝을 가져야 할 곳에는 꼭 가져야 하지 않을까? '다 그런 거지 뭐' 가 아니고 기억할 것을 기억하고 책임 물을 것은 물으면 좋겠다. 어제 오늘 갑작스러운 추위가 닥친 지금이 때마침 책임을 묻고 책임을 약속하는 중요한 때이다. 수험생들은 자신의 선택에 뒤끝을 가지고, 유권자들은 후보자에게 오래오래 뒤끝을 가졌으면 좋겠다.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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