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 한편의 낡은 책들을 들추다 만난 추억 한 조각. 오래된 위인전집 책갈피에서 발견한 빛바랜 크리스마스실에는 새들과 함께 하늘을 나는 소녀가 있다. 그의 앙증맞은 표정이 어린 시절의 기억을 불러낸다. 하늘이 나지막하게 가라앉는 겨울 초입이면 어김없이 크리스마스실이 등장했다. 비록 실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샀지만, 볼거리도 즐길 것도 부족했던 시골 소년에게 실의 디자인과 색감은 이야기와 상상의 세계를 활짝 열어줬다.

크리스마스실이 세상에 선을 보인 것은 1904년 덴마크에서였다. 코펜하겐의 한 우체국 서기로 일하던 아이날 홀벨이 연말에 몰려드는 우편물에 실을 한 장씩 붙여 결핵아동을 도우면 어떨까 생각한 게 시작이었다. 국내에서는 1932년 미국인 선교사 셔우드 홀에 의해 해주구세요양원 이름으로 발행됐다. 당시 국내 거주 외국인들을 상대로 모금운동을 했는데, 1940년 홀이 스파이 혐의로 일제에 추방되면서 중단됐다. 해방과 전쟁을 거치고 1952년 한국기독교의사회에 의해서 다시 발행됐지만 전쟁 직후의 피폐함으로 인쇄비조차 못 건진다. 이듬해 대한결핵협회가 창립되면서 이 사업을 맡아 오늘까지 이어오고 있다.

크리스마스실은 시대상을 반영한 소재로 관심을 끌기도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제기차기 널뛰기 등 민속적 도안이 많았고, 해방 뒤에는 다양한 주제가 다뤄졌다. 1970년 후반에는 자연보호시리즈를 테마로 천연기념물인 새와 야생화가 등장했다. 올림픽 전후해서는 우리 탈과 연, 농악, 세시풍속 등을 중심으로 세계를 향해 우리 전통문화를 소개했다. 최근 들어서는 이소연 김연아 등 화제의 인물이 등장하기도 했다. 발행 당시의 디자인적 역량을 집적했던 실은 우리 시각예술의 발전상과 역사를 한눈에 보여주기도 한다.

크리스마스실은 소액의 기부가 모여 세상을 변화시키는 '작은 나눔'의 실천이다. 후진국 질병이라는 결핵이 여전히 기승을 부리는 우리에게 실이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올해의 실은 프로야구를 소재로 9개 구단 마스코트를 담았다. 이웃을 향한 작은 관심들은 이제 거친 세상을 따뜻하게 만드는 나눔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