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벌초 나선 아저씨의 손길도, 제수거리 장만하는 아줌마의 마음도, 전통시장과 대형 슈퍼마켓의 판매대를 진열하는 상인도 한가위 준비로 분주하다. 명절의 뜻이 전통적으로 해마다 지켜 즐기는 날이라고 하지만 요즘 들어 명절이 마냥 즐겁지만 않은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이맘때면 어김없이 명절이 괴로운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넘쳐난다. 대표적인 것이 명절증후군에 관한 것이다. 처음에는 과도한 가사부담으로 명절이 노동절이 되어버린 주부의 고단한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2004년경에 타령조의 '며느리 푸념가'가 인터넷으로 소개되자 이에 공감하는 며느리들이 댓글을 달고 퍼 날랐다. 주부 명절증후군이 귀에 익숙해질 무렵, 다음에는 주부 못지않게 남편도 명절증후군을 겪는다는 이야기가 쏟아졌다. 부모와 친지에게 선물이나 용돈을 넉넉하게 드리지 못하는 죄송함, 민족대이동으로 인한 장시간 운전에 따른 피로감, 처가 식구들과의 문화 부적응 등으로 즐거워야 할 몸과 마음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요즘은 명절증후군이 미혼 남녀까지 확대되었다. 집안 어른들이 미취업자나 미혼자에게 명절에 하지 말아야 할 금칙어 리스트가 생겨나고, 젊은이들은 친척들의 송곳 질문을 피해 명절 연휴 때 집을 나설 정도로 명절이 불편하다는 것이다. 명절에 맛있는 음식 먹고 용돈 받는 즐거움을 누릴 것 같은 아이들도 예외가 아니다. 공부 제일 잘하는 사촌과 비교당하면서 기죽어 지내는 명절이 괴롭고 과식으로 늘어난 체중 탓에 명절을 보내고 나면 짜증이 늘어난다고 한다.
반대로 명절증후군을 이겨내고 새로운 명절문화를 만들어가는 가족 이야기도 최근 들어 늘어나고 있다.
40대 기혼여성인 나도 새로운 명절문화를 즐기는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다. 이런 명절 보내기가 가능한 이유는 오롯이 맏며느리인 형님의 결심과 실행 덕분이다. 몇 년 전 추석에 형님이 마침내 단안을 내렸다. 요지는 이랬다.
'여자들은 오랜만에 만나 '찌짐 뒤빈다'고 몇 마디 나누지도 못하고 남자들은 복잡한 귀경길을 피하려면 언제 출발하는 것이 좋을지 헤어질 궁리나 하는 명절문화를 바꾸고 싶다. 앞으로 설, 추석에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동서네는 궁금해하지도 말고 걱정도 하지 말고 집에서 쉬든지 어디 놀러 가든지 알아서 즐겁게 보내라. 가족 만남은 명절이 아니더라도 좋은 계절에 날짜 정해서 만나면 되고 내가 나서서 그렇게 할 것이다'.
그전부터 형님과 나는 명절음식을 분담해서 준비하거나 상차림을 간소화하거나 상을 차릴 때 돌아가신 분이 생전에 맛보지 못한 새로운 음식을 올리거나 명절에 식구들 먹는 음식 뒷바라지를 줄일 궁리와 시도를 해왔다. 두 며느리가 한조가 되어 앞서거나 뒤서거니 했지만 기실 20여 년 동안 명절문화를 조금이라도 바꾸어보려고 앞장 선 것은 형님이고, 나는 적극 동조자에 불과했다. 힘은 없고 짐만 무거운 맏며느리 노릇을 묵묵히 해내는 과정에서 세월이라는 우군까지 얻은 형님은 이제 명절문화를 바꿀 만큼 발언권도 강해졌고 실행력도 커졌다. 강해지고 커진 힘을 동서나 남편 압박에 사용하지 않고 자신과 주변의 행복증진 쪽으로 사용하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형님이 말한 대로 우리는 추석과 설에 만나지 않는다. 대신 명절 몇 주 전에 만나 함께 식사도 하고 차 마시면서 신나는 수다를 떤다. 민족대이동과 명절준비에서 한 발짝 벗어나자 우리네 명절 전통이 누구를 위한 전통이며 어떻게 만들어진 관례인지 생각해볼 여유가 생겼다.
농경시대의 선조들이 한가위를 가장 큰 명절로 만들어 넉넉하고 함께 나누는 음식문화의 전통을 물려주었다면 지식정보시대에 사는 우리는 어떤 날을 명절로 만들어 무엇을 함께 나누는 문화전통을 담아 후세에 물려주어야 할까? 전통이란 만들어진 상태에서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여건 속에서 새롭게 만들어가는 것이라면 우리는 어떤 '명절 스타일'을 창조해서 물려주어야 할까? 가족구성원의 욕구와 눈높이에 맞는 명절문화는 싸이의 강남스타일처럼 함께하면 더욱 즐겁고 신나는 그런 문화일 것이다.
부산여성가족개발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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