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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숲길] 고 녀석, 참 /이상섭

느림보 수목 백일홍, 더울때 진가 드러내…백일동안만 꽃 선물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2-09-07 21:05:03
  •  |  본지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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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채꼴 그늘도 주며 분홍빛 즐거움 전해

뒷산을 오르다가 녀석과 우연히 만났다. 그 후, 내 산행코스는 정해져버렸다. 능선을 따라 걷다가 녀석이 있는 길로 하산하는 코스. 그 코스를 고집한 것도 벌써 두 해째. 물론 녀석이 이봐, 지난 한 주 동안 잘 지냈나? 하는 내 물음에 대꾸한 적이 없다. 응답이라고 해봐야 스치는 바람에 제 여린 가지를 살짝 흔들 뿐이랄까. 그런데도 녀석 곁에 서면 마치 오래 사귄 연인처럼 마음이 설레곤 한다. '배롱'하고 소리 내면 혀끝이 아련해지는 느낌이랄까. 그 느낌이 내겐 그 어떤 연애 감정보다 좋다. 그래서 녀석을 찾게 되는지 모른다. 녀석은 지금쯤 한창, 끝물 꽃숭어리를 밀어 올리느라 제 뿌리를 동동거리고 있을 것이다. 여름 내내 '피고지고 지고피는' 그 질긴 꽃들의 작업을 마무리 짓기 위해. 이번 주에는 기필코 찾아가 녀석의 그 힘든 어깨를 다독여 주고 싶다.

산중턱에 선 녀석과의 첫 만남은 무덤가의 '돌벤치' 때문이었다. 누군가 갖다놓은 것인지 내 엉덩이 사이즈에 딱 맞는 평평한 돌덩이가 보였다. 나는 잠시 턱까지 차오른 숨도 고를 겸 엉덩이를 주저앉혔더랬다. 그때, 건들바람이 불었고 뭔가 내 얼굴을 강타했다. 움찔, 놀란 후 정체를 확인하니 자그마한 나무껍질이었다. 이게 어디서 날아왔지? 주위를 둘러보니 범인은 멀리 있지 않았다. 몸피에 아직 떨어지지 않은 같은 껍질이 매달고 있었으니까. 난 녀석을 뚫어져라 올려다보았다. 그런데도 녀석은 계속 딴청만 부렸다. 물론 그때까지만 해도 녀석의 수피가 그렇게 아름답다는 걸 모를 때였다. 그저 여타 수종처럼 그렇고 그런 노르스름한 색채를 띠고 있을 뿐이라 여겼다. 한데 자세히 보니 노르스름한 빛깔 속에 짙푸른 청동빛을 머금고 있는 게 아닌가. 마치 한겨울의 추위에도 꺾이지 않으려는 의지를 드러내듯이. 이후 난 녀석을 지켜보기 시작했고 내가 몰랐던 녀석의 참 모습을 알게 되었다.

녀석은 얇은 몸피로 겨울을 날 뿐만 아니라 결코 서두르는 법도 없었다. 다른 나무들이 잎을 다 틔울 동안에도 미동조차 없다가 "이제 봄이 왔나보군, 그럼 서서히 움직여볼까" 할 정도로 느림보 수목이다. 이런 느린 품성 덕분에 나도 처음엔 고사목으로 착각할 정도였으니까. 아무튼 녀석은 숲이 무성해진 다음에야 잎을 내밀기 시작한다. 마치 조급한 인간들을 일깨워주듯이. 세상이 자본 중심으로 흐르면서 사람들도 바빠졌다. 다들 빠르게, 더 빠르게, 좀더 빠르게, 더더 빠르게! 빠르지 않으면 경쟁에 뒤질 듯이 서두른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배롱나무 곁에 서면 녀석은 "이보게, 왜 이렇게 서두르나. 느리게 느리게 살게나" 하고 귓속말을 들려주는 셈이라고나 할까.
녀석의 수형 또한 일품이다. 이런 수형의 아름다움은 제 몸피를 함부로 부풀리지 않는 절제에서 온다. 녀석은 결코 과한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그런 품성은 가지에서도 알 수 있다. 녀석은 쓸데없이 가지를 뻗지 않는다. 그저 적당한 양의 가지만 뻗어 제 생을 유지할 뿐이다. 그런 절제와 균형이 수형의 아름다움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수형의 아름다움은 무더위가 시작되면 진가를 발휘한다. 그늘의 참맛까지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녀석의 잎은 마주보고 돋는다. 부채꼴로 퍼지는 가지의 특성상 드리운 그늘에는 구멍 하나 없기 마련이다. 그늘을 마치 촘촘한 바느질로 지어냈다고나 할까. 그러니 부채 하나 없이도 그늘 속에서 더위를 싹 잊게 되는 것이다.

녀석의 최고 미덕은 그 누가 뭐라 해도 단연코 귀한 시기에 꽃을 매단다는 점이다. 다른 나무들이 서둘러 꽃을 피우고 열매를 익힐 때에야 비로소 녀석은 느릿느릿 꽃숭어리를 매단다. 마치 이제 내 본래 면목을 보여줄 때가 되었구먼, 하듯이. 그리고 무더위가 본격적으로 기승을 부리는 이맘때쯤이면 차례차례 꽃을 피우고 지기를 반복해 백일 동안 우리에게 꽃을 선물한다. 그런 끈기가 백일홍이라는 이름까지 갖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니 어찌 이 녀석을 좋아하지 않으랴.

주말이 되려면 며칠 남았다. 그런데도 나는 벌써 기다리는 중이다. 부채꼴 그늘에 앉아 분홍빛 즐거움을 만끽할 그 여유로운 순간을. 산들바람에 제 가지를 흔들어 음악까지 들려준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오늘따라 녀석이 그립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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