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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숲길] '현실성'의 기준 /배유안

'현실성 없다'는 말로 대부분 지레 포기해, 실현 가능성의 기준 좀 높여보면 어떨까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2-07-20 20:02:40
  •  |   본지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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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대본이 탁월했던 드라마 한 편을 즐겨 봤는데 끝이 나버려 많이 서운한 중이다. 대사 하나도 허투루 쓴 것 없이 말 마디마디에 압축된 작가의 사회적 통찰과 비판의식, 무릎을 치게 하는 비유에 혀를 내두르며 보았다. 예전의 몇몇 정치적 사건들이 슬쩍슬쩍 오버랩 되기도 해서 보는 맛이 더 있었는데 아쉬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드라마에는 대통령 선거 당일에 후보자의 숨겨진 실체가 알려지자 투표를 하지 않고 있던 유권자들이 하나 둘 가게 문을 닫거나 소풍을 접고, 심지어 휠체어를 타고 투표장으로 모여들어 압도적 지지를 패배로 만든 극적인 장면이 있었다. 그런데 그 부분을 두고 어느 정치관계자가 했다는 진단을 신문에서 읽었다. 전혀 현실성이 없다고, 선거 당일 대여섯 시간밖에 안 남은 때라면 진실이 드러난다 하더라도 그 영향력이 판을 뒤집을 정도로 그렇게 크지는 않다고 했다.

그것이 선거를 많이 치러본 경험자의 경험적 판단이라는 게 문득 슬퍼졌다. 그동안 우리 국민이 진실을 진실이게 하는 데에, 정의를 현실화하는 데에 적극적 행동이 없었다는 의미이니까 하는 말이다. 결국 현실성의 기준을 낮추는 데 국민들이 한몫을 했다는 뜻이 아닌가? 조롱 받은 기분도 들었다. 드라마에 나오는 대사처럼 '이렇게 저렇게 국민들의 시선을 돌려 혼란하게 하면 머지않아 곧 잊게 되'는 바로 그 국민인 것 같아 부끄럽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작가는 이 대사를 통해 국민에게 각성을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작가와 정치가 두 사람에게 '현실성이 있다, 없다'의 기준은 무엇일까 생각해봤다. 정치가에게는 '국민들이야 알아도 그저 혀나 차고 있지, 투표로 행동하는 걸 별로 못 보았다'는 게 기준일 거고, 작가에게는 '남아 있는 표들이 움직이면 가능하다'는 희망이 기준일 것이다. 드라마의 작가는 대담하게도 91.4%의 투표율을 내놓았다. 그런 수치는 있을 수 없다는 비판도 나왔다. 그런 적이 거의 없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국민 대다수가 분노와 절실함을 느꼈을 때라면 절대로 불가능한 수치도 아니다. 어쩌면 내 한 표의 위력을 실감하지 않아 오랫동안 낮은 수치를 기준화 시킨 것에서 나온 비판일 수도 있다. 우리는 우리 사회의 개혁, 혹은 나 자신의 개혁에 대해 실현 가능성을 너무 낮게 잡고 있는 게 아닐까?

제주도 올레길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유럽에서 자연을 살린 길을 보고 우리나라도 이렇게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성 있다고, 특히 국가가 아닌 개인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온통 파헤쳐서 시멘트 발라대고 어쩌고 하면서 성토하는 것으로 끝내는 게 보통이다. 나도 그랬다. 우리 모두 현실성의 기준을 높여야 하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나에게도 기준을 높여야 할 게 많다. 뜻은 품었으나 썩 기대하지 않고 있는 것들을 다시 점검해 봐야겠다. 현실성을 경험치 이상으로 높여서.

불가능한 것을 상상하라고 했던,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말을 기억한다. 불가능하다는 것은 정말 불가능한 게 아니라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현실성 없는 것을 현실화하라는 것으로 고쳐 말해도 좋겠다. 정말 현실성 없는 게 아니라 현실성 없다고 여기는 것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현실성의 갱신을 도모해도 좋을 성싶다. 내가 첫 책을 냈을 때, 어느 분이 덕담을 해주었다. "이 한 권에서 끝내지 말고 앞으로 열심히 정진하여 꼭 세 권의 책은 낼 수 있도록 하라"고. 겨우 세 권? 하며 은근히 실망했는데 나는 이후 한 해에 세 권의 책을 낸 적도 있다. 그분이 생각하는 현실성과 내가 생각하는 현실성의 괴리가 너무 컸던 것이다.

대선 기사가 넘쳐나고 있다. 다가올 선거가 기대된다. 우리에게는 그동안 꿈꾸고 소망해 왔던 것, 이제는 정말 현실화시키고 싶은 게 정말 많으니까. 그나저나 나도 독자로부터 '끝나 버려서 너무 서운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작품 하나 쓰고 싶은데 현실성은 얼마나 될까? 남들이 들으면 비웃을 수치니까 혼자 품고 있어야겠다.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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