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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숲길] 수선하는 삶 /배유안

성폭행 범죄에 대해 관대한 우리나라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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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2-05-11 19:49:51
  •  |  본지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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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해자 두 번 울리는 사회의 그릇된 사고 이제는 고쳐야할 때

바늘 쌈지, 실패, 헝겊 쪼가리들로 마루가 어수선하다. 셔츠의 소매를 잘라 가벼운 셔츠로 고치고 운전할 때 쓸 토시 한 쌍을 만들고 나니 이 지경이 된 것이다. 그래도 기분은 상쾌하다.

일하다 막힐 때, 일을 시작해야 하는데 엄두가 안 날 때, 나는 주로 바느질 통을 잡는다. 유행 지난 넓은 통바지의 폭을 줄인다든가, 길어서 거추장스러운 소맷단을 줄인다든가 하면서 복잡한 머리를 식히는데 그러다 보면 성과에 비해 지나치게 시간이 들어 오히려 일할 시간을 잡아먹는 일이 허다하다. 그럴 때는 수선 집에 갖다 주면 단숨에 할 일을 손으로 꼼지락거리는 내가 가끔 한심해 보이기도 한다. 빵빵해진 허리밴드를 느슨하게 늘이거나 높은 구두 신던 시절의 바지 길이를 낮은 구두에 맞게 한 단 올리면서 내 몸의 변화에 한숨이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바늘에 실을 꿰어 이것저것 수선하면서 몸뿐 아니라 내 생활의 변화, 세상의 변화를 받아들이게 돼 숙연해질 때도 있다. 아이가 자라서 떠나고, 경제적 여건이 달라지고, 체력의 변화 등 삶의 상황이 변하면서 일상의 형태, 시간과 에너지의 배분, 무엇보다 내가 가지고 있던 삶의 가치 기준이 수선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수선이라는 게 한때는 잘 맞았던 거지만 지금은 맞지 않거나 낡은 것을 지금에 맞도록 고치는 거라면 수선은 온갖 것, 온갖 분야에서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나를 유심히 점검해보게 된다.

옷은 몇 십 분 혹은 한두 시간이면 거뜬히 수선이 되는데, 생각이라는 것, 생활 습관이라는 것은 여간해선 수선되지 않는다는 것도 바느질하면서 자주 깨닫는다. 내가 가진 편견, 독선, 결핍 등은 볼 때마다 그대로이다. 알고도 못 고치는데 하물며 모르고 있는 것들은 어떨까? 나는 참 수선이 안 되는구나 하고 쓴웃음을 지을 때가 많다. 그래도 긴 세월을 두고 보면 아주 조금씩 고쳐진 것도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위안을 삼는다. 그러니 어떤 일을 계기로 인생관이 바뀌면서 인생 자체가 천천히 달라진 사람들을 만나거나 TV나 신문에서 보면 존경과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가 없다.
엊그제 신문에서 아주 우울한 기사를 보았다. 성폭행 당한 딸을 데리고 아내가 외국으로 가고 남은 한 남자의 이야기였다. 집단가해자 10명 중 2명만 빼고 다 풀려나 버젓이 사는데 왜 피해자인 우리는 이 땅에서 못 살고 갈가리 찢어져야 하는가 하는 아빠의 절규에 가슴이 미어졌다. 얼마 전에 도주의 우려가 없다며 풀려난 성폭행범이 곧장 고소한 피해여성을 살해한 기사, 또 풀려난 지 사흘 만에 또 다른 성폭행을 한 남자의 기사를 보았던 차였다. 성폭행에 관한 한 우리 사회의 사고방식은 어쩌면 그리도 고쳐지지 않는지, 피해자와 가해자에 대한 시각이 바뀌어 있는 것도 그렇고,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어지간하면 풀어주는 판결도 그렇다.

예전,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가해자가 단지 일본인만이었을까? 그들이 돌아오지 못하고, 돌아와서도 숨어 산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지켜주지도 못한 사람들이 미안해하기보다는 오히려 부끄럽다며 받아들여주지 않은 것은 남성들만이 아니라 여성들조차 예외가 아니다. 작년에 대구 모 중학생들이 여중생을 집단 성폭행하고 한 말은 '너 선생님한테 말하면 소문낸다'였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소문내겠다고 협박하다니, 그래서 여중생이 말 못하고 계속 당했다니, 이 뒤집어진 사고를 이 아이들은 어디서 배웠을까?

나라를 지키지 못해 몽고에 끌려갔다 돌아온 고려 여성들이 환향녀라 해서 멸시 받았던 것도 그렇고 처음부터 잘못 굳어진 이 사고방식들이 이제는 더 미루지 말고 수선되어야 하지 않을까? 엊그제 신문에서 본 어느 아빠의 무거운 등을 다시 안 볼 수 있는 날이 제발 너무 오래 걸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늘은 오래 벼르던 일을 하나 했다. 오래 된 재봉틀을 꺼내 묵은 때를 꼼꼼히 닦았다. 치렁치렁한 장식이 달린 구식 침대보를 간편하게 만들거나 넓은 치마폭을 날렵하게 수선할 때는 좀 더 능률을 올릴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나를 수선하는 일도 더 나아지면 좋겠다.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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