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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칼럼] 정치적 실망이 요청하는 철학 /이택광

담론·교양으로 전락해버린 인문학…삶에 대학 학문으로 재정립하는 일 절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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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2-04-18 20:13:50
  •  |  본지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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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실망이 철학을 요청한다"는 명제는 마키아벨리 이래로 확인할 수 있는 진실이다. 정치의 계절이 왔지만, 또한 그 정치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직면할 수밖에 없는 실망은 지나간 시간을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것이다. 정치의 순간에 자신을 돌아보기는 힘들다. 물론 이 순간은 개인에게 사건이겠지만, 동시에 사회 전체로 본다면, 이 사건들의 조합을 통해 무엇인가 다른 것이 출몰할 수 있는 계기이기도 하다.

철학이 이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 그에 대한 사유는 번잡하게 많은 편이지만 그렇다고 명쾌하게 해결책이 제시되는 것은 아니다. 근대적인 삶을 지배하는 이론과 실천이라는 검질긴 두 범주는 여전히 통합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가속화하는 합리화의 과정은 점점 더 전문성이라는 이름으로 사유의 구조를 분리시키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인문학도 전문가의 담론으로 전락해서 교양의 영역으로 퇴출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일전에 국제콘퍼런스에서 만난 한 싱가포르 학자는 '문화연구'라는 실천적 학문이 어떻게 국가적인 프로젝트의 지원 대상이 되어서 '고급지식'으로 둔갑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런 실상은 한국에서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인문학이 교양으로 받아들여지고, 철학이 좀 더 세련되고 지적인 삶을 위한 사치품으로 인식되는 풍경은 이곳 한국에서도 그리 낯설지 않다.

인문학을 허세로 여기고 배척하는 것 못지 않게, 인문학의 지식을 정전화해서 절대적인 기준으로 제시하는 것도 또 다른 편향이라는 생각이다. 중요한 것은 인문학을 삶에 대한 학문으로 재정립하는 것이다. 인문학은 살아내는 학문이지 고시 공부하듯이 암기하는 학문이 아니다. 누가 어떤 말을 했다기보다, 그 말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표상해줄 수 있는지, 이 문제가 관건이다. 이런 맥락에서 1990년대 초반에 한국에서 활발하게 일어났던 '탈식민주의적 글쓰기' 운동은 여러 가지로 인문학의 현재화라는 측면에서 주목할 만한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이런 호시절은 그때뿐이었던 것 같다. 출판시장의 불황을 핑계로, 비평정신이 거세당한 얌전한 인문학이 좋은 인문학 대접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누가 읽어도 불편하지 않은 인문학이 대중이라는 히드라의 그림자 뒤에 숨어서 판을 치는 상황이 벌어졌다. 대표적인 것이 선거판에서 벌어진 웃지 못 할 일들이다. 나름대로 인문학자들의 정치개입이라고 할 만한 일들이 벌어졌는데, 그 방향이 전혀 인문학의 본질과 관계가 멀었던 것이다.

대중에게 아부하는 제스처가 인문학의 이름으로 통용되는 것도 아이러니지만, 도저한 휴머니즘을 주장하면서 정작 노동의 현실이나 소수자의 처지에 눈감는 것도 역설이다. 물론 이렇게 인문학이 현실에 눈뜨게 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가리는 장막으로 작동하는 경험이 반드시 우울한 것은 아니다. 1968년 이후 프랑스 철학에서 제시된 반인간주의 철학의 의미가 비로소 진지하게 사유되어야할 시점이 우리에게 다가온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황망한 현실에서 하나 마나한 소리나 하는 인문학자들을 보고 있으면, 이들이 주장하는 '인간'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던 과거의 철학자들에 공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인문학이 누구에게 복무하는 학문인지 되물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현재진행 중인 것이다. 여기에 대해 이른바 '동업자'라는 명목으로 침묵한다면, 이 또한 책임 방기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전후 하이데거를 통해 새로운 철학의 토대를 만들어가려던 프랑스 철학자들에게 신에 가까운 이 위대한 철학자의 나치 부역은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이 진실을 통해 어떻게 철학을 재구성할 것인지, 이 문제에 대한 부단한 고민들이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프랑스철학의 개화를 만들어냈다. 이들의 철학을 들여온다고 자동적으로 우리의 인문학이 형성되는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고대에 보이지 않는 것을 비추는 것이 철학의 임무였다면,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사유의 가닥은 보이는 것을 의심하고 보이지 않는 것에 드리워져 있어야할 것이다.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낼 수 있는 인문학이 절실한 까닭이다.

경희대 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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