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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숲길] 그날의 화이트 /이상섭

별 하나 없는 밤거리, 네온사인 더 극성…눈송이 펑펑 내리는 화이트 세상 그리워

  • 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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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2-02-10 21:14:11
  •  |  본지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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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 삼아 약속 장소까지 걷기로 했다. 운동은 하루를 짧게 해주고 평생은 길게 해준다는 말도 있잖은가. 문구를 발견한 건 횡단보도 앞에서였다. '누구나 가슴속엔 화이트가 있다!' 휴대폰 대리점 유리창에 붙여진 광고 문구를 본 순간까지만 해도 저따위의 평범한 문구로 소비 충동을 자극하려 들다니 쯧쯧, 하고 말았다. 그런 다음 다시 걸음발을 내디뎠다. 계절을 잊게 만드는 티 없이 깨끗한 하늘 탓일까. 포스터의 문구가 다시금 새록새록 떠오르는 게 아닌가. 포스터 속에는 하얀 눈송이가 내리고 있었고, 꼬마 아이 하나가 허공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누구나 가슴속엔 화이트가 있다? 생각해보니 그 말이 틀린 게 아니었다. 나 또한 가슴이 티 없이 순수했던 시절이 있었으니까. 그래서 한때 겨울이 어울리는 남자라고 '자랑질'하고 다녔으니까.

모임은 이른 시각부터 흥성이고 있었다. 첫 소설집을 상재한 작가에게 축하의 말을 건넨 뒤 나는 구석 자리에 앉았다. 망할 놈의 문구 탓일까. 자꾸 내 눈은 창밖으로 향하는 것이 아닌가. 첫눈을 보면 지난날의 순수를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나도 모르게 안주인에게 묻고 말았다. 혹시 이 집에 화이트 있어요? 화이트요? 우리 식당엔 그런 술은 없는데. 괜한 걸 물어봤다 싶었다. 하긴 이 집에만 화이트가 없을까, 이 땅 전체에 화이트가 상실되었는데. 내 '초미니 실망'을 눈치 챈 것일까. 마주앉은 선배작가가 나선다. 아니, 뜬금없이 웬 화이트를 찾고 난리야? 요거나 조거나 그냥 마셔! 그러고 보니 테이블 위에는 한창 소주전쟁을 벌이는 양대 회사의 대표들이 도열해 있었다. 점유율을 고수하려는 측과 이전의 사랑을 회복하고자 하는 측. 한때 향토기업을 살리자며 부산사람들 모두가 순수한 마음으로 들이붓듯 마셔준 술. 그 술병에 이상하게 오래 눈길이 머물렀다. 참, 어지간히 마셔줬다. 그랬는데 어쨌나. 순수만 털어먹고 내빼지 않았나. 지금에 와서 다시 사랑해 달라고? 아무리 주인이 바뀌었다고, 새로운 상표로 시작하겠다고 해도, 순수를 강탈당한 부산시민들의 허탈감은 어쩔 것인가. 다시 사랑받고 싶으면 허탈감부터 어루만져줘야 하지 않을까.
내가 이런 순수 삼매경에 빠져 있을 때, 테이블 위로 올라온 건 '소금꽃'이었다. 309일간 35미터 크레인에서 고공농성을 했던 김진숙. 사실, 나 또한 그녀가 크레인에서 내려오는 모습을 TV화면으로 지켜보았다. 그때 그녀는 눈송이처럼 환했다. 아니, 하늘에서 보낸 눈사람 같았다. 어쩌면 그게 그녀의 하얀 머리카락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정말이지, 살기 위해 올랐다가 주검으로 내려온 이가 얼마든가. 김주익이 그랬고, 용산 철거민이 그랬고, 쌍용차 강제진압을 당했던 이들이 그렇지 않은가. 그들의 죄라고는 화이트한 세상을 꿈꾼 것 뿐이다. 정작 그들을 죽음으로 내몬 건 '부의 영토'만 악착같이 지키려던 불순한 자본이 아니던가. 거기에 맞선 것이 그녀였고 희망버스였다. 그런데 작가인 나는, 제대로 글을 쓰고 있는가. 습작하던 그 시절의 순수함은 유지하고 있는가. 고개가 절로 갸웃거려졌다. 그래서 선배에게 물었을 것이다. 선배님은 혹시 소설 포기하고 싶은 적 없어요? 있지. 언제요? 언제나. 왜요? 좋은 소설을 쓸 능력이 없다 싶어서. 그래서 지금은 안 써요? 쓰고 있지만 잘 안 써지지, 이놈의 세상공부 다시 하느라고. 말을 끝낸 선배는 고개를 허공으로 들어올렸고 나는 안경을 추어올렸다. 그런 다음, 나도 선배도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화제는 어느새 현 정권을 향해 화살을 겨누고 있었다. 누군가 이번 선거에서 순수한 시민의 마음을 모아 투표로 응징해야 한다고 했다. 일행 중 누군가는 그걸 '선거혁명'이 아닌 '투표혁명'이라 불러야 한다면서 그 차이점을 꽤 오랫동안 설명하기도 했다. 투표율이 그만큼 중요하다면서. 하지만 이상하게 나는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죄짓는 기분이었다. 화장실을 핑계로 몰래 엉덩이를 들고 말았다. 거리로 나서자 네온사인이 온몸을 휘감았다. 역시 자본은 밤에 더 극성을 떠는 모양이었다. 혼자 시적시적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다시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별 하나 없이 어두웠다. 그런데도 나는 자꾸 눈송이가 펑펑 쏟아지는 화이트 세상이 그리웠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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