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순환하는 봄 오면 내 언 손도 녹으리라
작은 바닷가 마을의 작업실 창틈 사이를 파고드는 차가운 공기에 손발이 부쩍 시리다. 손이 굳어지는 것은 무엇보다도 부담스러운 난방비가 그 원인이겠지만 최근 들어 부쩍 손발의 혈액순환이 원활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돈도 안돌고 피도 잘 안 돈다. 문제다.
얼마 전 미술잡지에 어느 40대 작가에 대한 글을 실었다. 국내외로 왕성한 활동을 하며 호평을 받는 작가지만 미술시장과는 거리가 있어 어려움을 겪는 현실에 관한 글이었다. 작가로서의 활동에 반비례하여 갈수록 힘들어지는 형편 때문에 국수장사라도 병행해야 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나눈 내용이었다. 글에서 실명을 밝히지 않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작가가 ××아니냐' '○○작가도 그런 생각하던데 맞지 않느냐'라는 질문을 받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물어보는 작가는 실제 잡지에서 언급한 그가 아니었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처지의 작가가 한두 명이 아니었던 거였다. 참 웃지 못할 일이었다.
지난해 10월 '예술인 복지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서 올 11월 시행될 예정이다. 조각가 구본주의 사망사고에 대한 보험문제에서부터 지난해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의 안타까운 죽음으로 예술인 복지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었던 터다. 2003년 교통사고로 사망한 구본주 작가의 경우, 그는 미술계에선 꽤 유망한 작가로 인정받았지만 국내 굴지의 보험사는 예술가로서의 경력과 경제활동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려 해 많은 예술인들이 문제를 제기한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예술가의 노동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 대해 많은 논의를 촉발하게 되었다.
오랫동안 제기되어온 이 복지법안은 예술인의 가치와 지위를 인정하려는 토대를 마련한 선언적 성격이 짙다. 세부적인 시행령과 시행규칙 문제는 여전히 많은 논의를 거쳐야 한다. 예를 들어 단체에 속해 있지 않고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시각예술이나 문학과 같은 개인의 경우엔, 별 도움이 되지 못할 수도 있다. 즉 예술인을 규정하는 문제에서부터 복지기금 등 보다 세심한 고민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부산에서는 며칠 전, 부산문화재단의 '비전 2020' 선포식이 있었다. 재단의 나아갈 방향과 과제를 공표하는 자리였는데 그 핵심가치로 해양, 미래와 함께 '순환'이 포함되었다. 재생과 창조, 시민의 향유와 창작의 유기적 관계가 중요하다는 의미다. 앞으로는 계획한 실행과제들이 얼마나 실현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 말 그대로 선포로 끝나지 않아야 한다. 이를 위해선 시민과 문화예술계의 관심은 물론이지만 부산시의 관심과 지원이 필수적이다. 너무 식상한 말이지만 사실이다.
올해 정치적으로도 굵직한 일정이 많은 부산은 미술 부문에서도 큰 행사들이 있다. 비엔날레가 있고 아트페어도 열린다. 비엔날레 전시는 시대의 현상을 파악하고 사회적 담론을 생성하는 것에 비중을 두고 있고 아트페어는 작품의 판매를 통해 예술유통의 측면을 고려하는 행사다. 2012부산비엔날레는 카셀도규멘타 예술감독을 역임했던 로저 M 브뤼겔(독일) 씨가 전시감독을 맡아 이전과는 다른 시도를 한다. 지난달 30일 응모를 마감한 '배움위원회'라는 시민모임을 구성하여, 지속적으로 감독과 작가와 교류하면서 주제와 방식을 함께 논의하고 서로 배워가며 이른바 '배움의 정원'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일반시민의 참여 그리고 예술과의 소통이 어떤 방식으로 관계 지어질 것인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또 한편으로는 벡스코 주관의 아트페어인 '아트쇼 부산 2012'가 오는 6월 해운대 벡스코에서 열린다. 부산 미술시장은 그 잠재적 가능성에 비해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다. 어려운 지역 여건에서 야심차게 시작하는 것인 만큼 이 또한 성공적인 행사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창작과 향유 그리고 교육과 정책 간의 순환은 지역의 문화 자생력을 위해 매우 필요한 관계다. 미술만이 아니라 공연이나 문학과 같은 분야도 마찬가지다. 몸 안의 피가 잘 돌아야 건강한 것처럼 올해는 부산 예술계도 좋은 작품과 이를 즐기는 관객, 즉 창작과 소비, 비평과 교육, 이를 뒷받침 해주는 정책 등이 건강한 순환 고리를 갖게 되기를 희망한다. 봄날이 올 때까지 차갑게 언 손을 더 세게 비벼야 겠다.
미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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