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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칼럼] '도가니' 신드롬에서 보는 희망 /주유신

세상을 바꾸자 했던 '이감적 동일시' 속의 많은 노력과 열정이 희망의 불씨로 승화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1-11-16 20:37:49
  •  |  본지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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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이미지, 음향, 서사와 같은 다양한 요소들을 통해 개인적 환상과 사회적 이데올로기들을 다채로우면서도 유혹적인 방식으로 형상화함으로써 대중들의 감각과 의식에 가장 설득력있게 다가가고 수용될 수 있는 문화적 텍스트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대중적인 감수성과 상상력을 가장 잘 포착하고 표현할 수 있는 장이자 개인적, 사회적 무의식의 축약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영화가 관객에 의해 수용되는 과정에서 이런 의미효과를 내는 핵심적인 기제는 바로 동일시(identification)이다. 동일시는 영화의 재현이 필연적으로 기반하게 되는 부재(즉 영화가 실제 현실이 아니라는 사실)를 은폐함으로써 영화와 관객의 거리를 좁히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1999년 미국의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13명이 숨진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났을 때 두 명의 청소년 범인들이 '내츄럴 본 킬러'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서 올리버 스톤 감독이 기소되었던 사실은 '거리를 유지하는 데에 실패한 영화적 동일시'가 어떻게 실재에 비극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최근에 '도가니'라는 한 편의 영화가 일으킨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신드롬은 이런 '동일시'와 연관하여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원래 공지영의 원작소설도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연재되면서 무려 1600만 회라는 엄청난 조회 수를 기록했다. 그러나 이 소설이 영화화된 이후에 우리 사회에서 일어난 전방위적인 반향은 이와 비교하기 힘들 정도의 것이다.

우선 영화를 볼 때 일어나는 동일시는 두 단계로 나누어질 수 있다. 일차적인 것은 바로 카메라 시선과의 동일시로, 순수 지각적인 차원의 이것은 모든 영화적 경험에서 공통적으로 일어난다. 이차적인 것은 영화 속의 스토리 혹은 캐릭터와의 동일시이고, 이는 개별 영화마다 다른 양상을 띠게 된다.

그렇다면 '도가니'가 일으킨 공분(公憤)과 이에서 출발한 여론 형성 및 현실 개혁의 움직임들은 법과 행정, 종교와 교육을 막론하고 우리 사회가 '부패와 비리의 도가니'임에 대한 충격적인 인식 그리고 그 안에서 고군분투하는 힘없는 자들에 대한 연민과 죄책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이것만으로는 충분히 납득되지 않는 측면이 있다. '살인의 추억' '아이들' '그놈 목소리' 등 충격적인 실화를 소재로 한 다른 영화들과 비교해도 '도가니' 신드롬은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떠오르는 것이 바로 '이감적(heteropathic) 동일시'이다. 마치 구강기의 어린아이가 자신이 욕망하는 모든 대상을 입으로 삼켜버리는 것처럼, 타자를 자신 안으로 완전히 흡수하거나 통합하는 '공감적(idiopathic) 동일시'와 반대되는 이것은 자아가 타자에 의해 압도되거나 속박됨으로써 주체가 타자의 인성 속으로 함몰되는 현상이다.

따라서 '자기(self)'의 상실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런 동일시는 나의 외부에 존재하는, 나와는 차이를 지닌 '고통받는 타자'와의 동일시에 기반한다.
그런 점에서 어린아이가 아니고, 청각장애인이 아니며, 성폭력 경험이 없는 대부분의 일반 관객들은 '도가니' 속의 사건과 주체들을 직면하게 되는 순간 자기 자신과 고통받는 희생자의 중간쯤 어딘가에 놓여지면서, 일종의 피학증적 엑스터시를 경험하게 된다. 정신분석학에 따르자면 공감적 동일시는 가학증으로 번역되는 반면 이감적 동일시는 피학증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는 어쩌면 한 편의 영화 관람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역사적 과정에서 자신과는 다른 계급의 고통과 동일시한 수많은 혁명가들 뿐만 아니라 최근 한진중공업 사태에서 새로운 방식의 시위문화로 떠오른 '희망버스'에 이르기까지, 세상을 좀 더 살 만한 곳으로 바꿔내고자 했던 많은 노력과 열정의 추동력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이감적 동일시'에서 아직은 꺼지지 않은 희망을 볼 수 있다는 판단, 무리는 아니지 않을까 싶다.

영산대 영화영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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