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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숲길] 사랑과 사랑 /이상섭

인간은 우둔해 사랑만이 생을 찬란하게 만든다 착각하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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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1-07-29 19:52:52
  •  |  본지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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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은 들었다. 마음이 물처럼 맑은 녀석이 사랑의 유탄에 쓰러졌다는 걸. 하지만 연락처도 없었고, 그렇다고 연락처를 수소문해가면서까지 캐물을 사안도 아니었다. 그러니 내가 한 일이라고는 고작해야 허공으로 눈길을 들어 올리는 것밖에. 한데 녀석으로부터 뜻밖의 연락이 왔다. 그러니까 자그마치 강산이 두 번 바뀔 만큼 세월이 흐른 뒤였다. 당장 녀석을 만나 근황이며 아픔의 수위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 바람에 나는 일방적으로 약속을 정하고 몸을 서둘렀다.

녀석과 나의 인연은, 키보다는 꿈이 한창 성숙하던 시절이었다. 막 입학한 아이들을 앉혀놓고 반장선거를 했다. 한데 다른 아이들을 제치고 녀석이 당당히 반장으로 당선되는 게 아닌가. 반장이 된 녀석의 몸피를 보자니 반장 역할이나 제대로 해낼까 걱정이었다. 하지만 그건 기우였다. 몸은 약해 보였지만 타고난 '영혼의 맷집'이 대단했다. 또래들을 휘어잡는 말솜씨며 품 또한 넉넉해서 덕분에 그야말로 일 년 동안 태평성대를 맛볼 수 있었다. 진급한 이후에도 녀석은 졸업하기까지 반장 자리를 내놓지 않았다. 그랬으니 녀석을 꿰차는 사내라면 '봉잡은'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니나 다를까 직장생활을 하던 중 뜻밖에 녀석의 마음을 '뿅가게' 하는 남자가 나타났고, 당연하다는 듯이 한동안 두 사람 사이에 밀고 당기는 연애 과정이 펼쳐졌다. 그러다가 관계에 가속도가 붙으면서 급기야 식까지 거행하게 되었다. 그랬으니 행복의 문을 향해 돌진하고 있으리라 여겼다.

해후의 반가움도 잠시였다. 벌겋게 달아오른 숯불이 테이블에 놓이는 순간 나는 아차, 싶었다. 무더운 날씨를 깜빡했던 것이다. 사실 내가 갈빗집을 고집한 건 아주 단순한 결정이었다. 그간 마음고생이 심했을 것이니 고깃점이나마 실컷 '멕이고' 싶어서랄까. 부산사람에겐 '먹이는' 것과 '멕이는' 것은 차원이 다르니까. 먹이는 건 단순히 배만 불린다는 의미를 띤다면 '멕이는' 건 음식에 사는 이의 마음까지 보탠다는 의미가 강하니까. 그랬으니 동석한 녀석의 '절친'이 질투를 하든 말든,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녀석의 '앞접시'에 고깃점을 올리기에 바빴다. 녀석은 친구와도 오랜만에 만났는지 케케묵은 추억을 되새김질하느라 웃고 떠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녀석의 표정을 흘낏거렸지만 아픔의 흔적은 배어 있지 않았다. 아무래도 소문이 와전된 것만 같았다.
녀석의 친구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 기다렸다는 듯이 조심스레 내가 물었다. 어찌된 소문이냐고, 그게 사실이기나 하냐고. 녀석은 잠시 소주잔을 애완동물처럼 어루만지기만 했다. 그러더니 아주 태연하게 남 얘기하듯 말하는 게 아닌가. 결혼 후였어요, 남자에게서 썩는 과일 냄새가 나기 시작하더군요, 방향제를 뿌리고 매일 양념처럼 고성을 질러도 냄새는 사라지지 않았죠, 그 바람에 하마터면 방에 화염병을 던질 뻔했다니까요? 그러면서 갑자기 깔깔깔, 웃음까지 보탰다. 녀석의 쾌활한 태도에 내 눈이 커졌다. 하지만 어쩌겠어요? 죽거나 죽이지 않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요.

인간은 우둔하기에 사랑만이 생을 '찬란'하게 만들 거라고 '착각'하며 산다. 사랑이야말로 우리 생에 예상치 못한 택배 같은 것. 그걸 풀어봤을 때에야 진면목을 발견할 수 있다. 문제는 그게 후회와 함께 배달된다는 거다. 하지만 배달되는 사랑을 거부하기엔 녀석이 너무 젊지 않은가. 이대로 주저앉기에는 생이 너무 아득하지 않은가. 그래서 내가 물었을 것이다. 실패는 또 다른 시작이라니 다시 사랑하고픈 마음이 없냐고. 녀석은 도리머리를 했다. 평생 흘려야 할 눈물은 그때 다 흘렸는걸요. 녀석의 눈에서 무슨 결의문 같은 게 씌어 있는 듯했다. 그깟 사랑 때문에 더 이상 불행을 자초하진 않을 거라는. 하긴 얼마나 힘들었으면 저런 반응이 나올까. 아직 '러브러브할' 나이에. 사랑이야말로 나이 불문하고 걸리는 '낭만적 질병'이라잖은가. 돈, 명예, 권력 중 하나를 잃어도 죽는 늙은이와 달리 젊은이는 사랑 하나만 잃어도 목숨 건다는데. 녀석이 걱정하는 내 마음을 알아챈 것일까. 대뜸 정색하고 나섰다. 에이,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그렇다고 제 인생마저 포기할 만큼 어리석진 않으니까, 우리 건배나 해요! 녀석이 웃으며 술잔을 들어올렸다. 그러고 보니 환한 표정만은 예전과 달라진 게 하나 없었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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