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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숲길] 논둑 막걸리 잔치 /이상섭

내가 날랐던 새참 이젠 아버지가 사와…이게 세월 탓인가 코끝이 싸했다

  • 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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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1-06-03 21:52:25
  •  |  본지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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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두새벽이었다. 전화가 날카롭게 울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수화기를 들었더니 아버지였다. 좀처럼 직접 전화를 내는 양반이 아닌지라 웬일인가 싶었다. 빗방울이 굵어 물 좀 잡아야 쓰것는데, 이번 주에 바뿌냐? 마치 하늘 눈치를 보고 있다가 봄비가 내리기 무섭게 전화한 듯싶었다. 말투로 보아 지금 당장 일을 하지 않으면 논바닥의 물이 기러기처럼 날아갈 듯한 다급함이 배어 있었다. 하지만 내 마음은 심드렁했다. 이번 산행에 꼭 참가한다고 큰소리까지 쳐놓았던 것이다. 그냥 트랙터 불러 쓰면 안 돼요? 돌아오는 대답이 '대략난감'이다. 근데 어쩌냐, 트랙터 주인이 교통사고로 어깨를 다쳐 지금 '꼼짝달싹'을 못한다는구먼.

아버지가 다리를 저는 것도 경운기 탓이다. 나이를 무시하고 젊을 때처럼 무리하게 조작하다가 경운기를 포옹한 채 논둑 아래로 곤두박질쳤으니까. 덕분에 고관절수술까지 받아야 했다. 하지만 후에도 농사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나이 들어 몸 움직이지 않으몬 병나, 그라고 농사일이야 요즘은 일이기나 하냐? 틀린 말이 아니었다. 예전 같았으면 일일이 고단한 육체를 부려야 농사일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그래도 기계가 대신하니까. 하지만 올해는 기계 덕을 볼 수 없으니 아버지로서는 난감했을 것이다. 시간을 끌었다간 다음 비를 기다려야 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써레질과 모내기도 늦어질 테니까.

세 시간 가까이 걸리는 거리. 거가대교가 개통되면서 한 시간대로 짧아졌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하지만 달려가는 내내 길바닥이 울퉁불퉁하기만 했다. 집에 도착했더니 자식 길눈만 하고 있었던지 아버지가 서둘러 엉덩이를 털었다. 나를 반기던 어머니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는 어디 가셨어요? 몰러, 어디 마실이라도 나갔나? 아버지의 말투에도 확신이 없어 보였다. 옷을 갈아입고 마당으로 나서니 이번에는 아버지마저 보이지 않았다. 논으로 향하는 길로 접어드니 아니나 다를까 경운기 곁에 선 아버지가 눈에 띄었다. 경운기 시동이라도 미리 걸어놓을 셈이었나보다. 하지만 딱히 쉽지 않은 낌새였다. 내가 다가갈 때까지 아버지는 힘에 부대끼는지 풀풀, 연기만 쏟고 있었다. 이놈도 나이를 먹어 그런가, 초크를 몇 방을 멕이도 이 지랄이네? 이리 줘 보세요. 내가 한방에 경운기 시동을 걸어버렸다. 아버지는 무안한지 흠흠거리며 돌아섰다.

비가 제법 내리긴 내린 모양이었다. 고인 물이 찰방찰방 내 허벅지에 달라붙었다. 간질거리는 아내의 손길처럼 기분 좋았다. 덕분에 불만마저 잔잔해져 경운기 꽁무니만 훌쫓을 수 있었다. 금세 온몸에 땀방울이 솟았다. 딱딱하던 흙덩이는 물기를 머금은 탓인지 경운기가 지나갈 때마다 곤죽으로 변했다. 이렇게 써레질을 해놓으면 곧 모내기가 이뤄지겠지. 그러면 내 땀방울을 영양분 삼아 벼가 키를 키울 것이고. 괜히 가슴에서 맑은 종소리가 나는 듯했다.
아버지는 논둑에 앉아 내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걱정 말고 집으로 올라가시라고 소리쳐도 도리질이었다. 한참 뒤 다시 아버지 눈치를 살폈다. 아버지가 보이지 않았다. 뒤늦게 내 진심을 알아차렸나? 한데 그게 아니었다. 멀리서 검은 봉지를 든 채 논을 향해 다시 걸어오는 아버지가 보였다. 논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나를 향해 손짓을 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경운기를 세우고 밖으로 나섰다. 출출할 테이 이기나 묵고 해라. 아버지가 사온 건 막걸리였다. 한때 아버지가 새참으로 즐기던 막걸리. 그건 어릴 적 내가 단골로 사오는 음식이기도 했다. 한데 그것을 아버지가 사오고 내가 받아먹다니. 이게 다 세월 탓인가. 코끝이 싸했다.

그때였다. 논으로 향하는 길에 임을 인 어머니가 보였다. 저런 할망구를 봤나, 참을 이리 늦게 갖고오몬 우야노? 아버지가 구시렁거렸다. 어머니의 걸음은 한없이 느렸다. 한걸음 쉬고 숨 한번 내쉬는 게 멀리서도 보일 지경이었다. 하이고, 볼시로 이리 마이 써리삐릿나? 겨우 다가온 어머니가 모둠숨을 내쉬며 말했다. 한데 이게 웬일이람. 내려놓은 참거리에서 또 막걸리 병이 수북하게 쏟아지는 게 아닌가. 이것마저 마셨다간 돌아가는 길에 음주운전 단속에 걸리기 딱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나는 양친이 겨끔내기로 건네는 막걸리를 벌컥거리고 있었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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