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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숲길] 기억의 감동 /배유안

지인들이 캐서 보내준 쑥에서 봄날의 들판 즐거움 떠올라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1-05-06 20:36:25
  •  |   본지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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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는 4, 5, 6월을 시골에 머물거나 부산과 시골을 오가며 작업을 했던 덕분에 틈틈이 취나물 뜯는 기회를 즐겼다. 틈틈이 수북한 나물 보따리를 들고 와 지인들에게 나눠주고 남은 건 데쳐서 냉장고에 넣어두었더니 일 년 내내 상큼한 취나물을 즐길 수 있었다. 한 해를 끝내는 겨울쯤엔 그 해의 건강이 봄 땅의 힘을 고스란히 간직한 취나물 덕분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취나물은 봄만 간직한 게 아니었다. 쪼그리고 앉아 내 손으로 직접 뜯은 취나물은 그걸 뜯을 때의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뭔가를 쓰다가 기지개가 날 때쯤 손칼을 찾아들고 나갔던 야산과 밭의 풍경, 풀리지 않아 괴로울 때 챙모자 쓰고 운동화 신던 참담한 기억, 거기다 손으로는 나물을 뜯으며 마음으로는 자신의 한계에 대한 고민들로 가득 차 있었던 것도 기억하고 있었다. 막혔던 한 장면이 풀리면서 주르르 작품을 완성한 후 기분 좋게 밭을 더듬으며 나를 아는 모든 이들에게 나눠줄 것처럼 자루 가득 나물을 뜯어 채우던 희열도 기억하고 있었다. 자괴감과 성취감, 혼자의 고요함과 만물의 부산함이 교차했던 지난 계절의 나에 대한 기억은 놀랍게도 큰 힘이 있었다. 또다시 찾아온 자괴감에 짓눌리지 않고 가을과 겨울을 버티는 힘이 되어주었다.

지난 겨울, 괴테와 헤세와 카프카의 흔적이 있는 곳을 혼자 여행하면서 십대와 이십대의 나를 기억해 낸 것은 큰 소득이었다. 잊었거나 스스로 무시했던 기억들이었다. 나는 그 시절, 아무렇게나 시간을 흘리며 산 것이 아니었다. 괴테와 헤세와 카프카를 심취해서 읽었던 때의 희열과 아릿함의 기억들이 고스란히 내 안에 있었다. 그 시절을 살던 '나'가 펄펄 살아 있었음을 기억했고, 어쭙잖은 고민들에 대한 기억들 또한 오늘의 고민들과 맞닿아 있었다. 지난날의 추억이 아니라 밑바닥에 깔려 현재까지 이어져온 기억이었다. 그 기억들은 오늘의 나를 긍정하는 위력을 발휘했다. 덕분에 낯선 길을 걸으며 삶의 진행에 대해 진중하게 생각했다.

가끔 내 삶의 시작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날이 아닐 거라는 생각을 한다. 역사적 사건이나 오래 전의 일을 소재로 창작을 하느라 지난날의 일들을 들추어 보면서 더더욱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자료를 찾아 읽고 쓰면서 작중 인물이 된 듯 여겨졌던 감정이입이 마치 나의 오랜 기억 같을 때가 더러 있었다. 최근 신화 관련 책을 자주 접하게 되었는데 시작점과 원형을 알 수 없는 신화를 읽으며 작년과 올해의 연결, 천 년 전과 지금의 연결, 더 오래 전과 현재의 연결이 어쩌면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축적된 기억의 문제가 아닐까 싶기도 했다. 지난주, 친정아버지 생신이라 가족이 경주에 모였는데 함께 왕릉과 박물관을 둘러보면서 세계 어디를 가든 사람들은 왜 유적지와 박물관에 공을 들이고 너나 없이 둘러보는가 하는 새삼스럽고 원초적인 의문을 가졌다. 아스라한 기억을 불러오는 행위로 여겨지는 것이었다. 우리는 과거와 현재, 나와 너의 구분이 없는 근원적인 기억들을 갖고 있는 게 아닐까?

올해 봄, 나는 작년 취나물을 뜯던 그곳을 그리워만 하고 가지는 못 한 채 취나물의 계절을 보내고 있다. 절절하지 않은 탓도 있지만 간단히 싸들고 떠날 형편이 그리 쉽게 오는 게 아니기 때문이 더 크다. 그랬더니 올해는 취나물 대신 쑥이다. 그것도 내가 직접 뜯은 게 아니라 지인들이 자꾸 주었다. 어린 쑥 몇 움큼에 조개나 도다리 넣고 끓인 쑥국이 지나가고 나니, 좀 자란 쑥이 와서 쑥전을 부쳐 먹고, 이어서 쑥인절미, 쑥절편 등 완제품들이 여기저기서 들어왔다. 다들 어디서 누구랑 쑥을 캤다는 즐거운 기억과 함께 건네주었다. 나는 얻어서 먹는 쑥을 즐겼다. 그들의 즐거웠던 봄날과 나눠주는 기쁨과 나를 기억해준 고마움을 함께 먹었다. 내가 뜯지 않은 쑥을 먹으면서 쑥 캐는 즐거움과 봄날의 들판까지 떠올리는 건 예전 나의 경험에 대한 기억일까? 그들의 기억일까? 그들이 나에게 건네준, 이제는 나의 것이 된 기억일까? 시장에서 산 쑥을 먹으면서는 들판과 야산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게 답이 될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올해 엄청 받았던 쑥에 대한 기억이 일 년 내내 나를 행복하게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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