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산메디클럽

[아침숲길] 문자위복(文字爲福) /이상섭

낯선 사람에게 받은 엉뚱한 문자 메시지에 대처하는 자세

  • 국제신문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1-04-15 19:58:22
  •  |  본지 23면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주소복사
  • 스크랩
  • 인쇄
  • 글씨 크게
  • 글씨 작게
   
우웅, 휴대전화가 울었다. 문자 메시지라도 도착한 모양이었다. 모처럼 책상과 우정을 나누며 안 풀리는 소설 때문에 골머리를 하고 있던 나는 무슨 뭉게구름이라도 휘어잡고 싶은 심정이라 휴대전화를 사정없이 낚아챘다. 한데 문자를 확인하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당신이 오늘밤 12시 전에 잠들면 난 당신의 겨털 다섯 가닥을 뽑아갈 것이다, 푸하핫! -괴도 겨털"

아니, 이게 무슨 괴문자란 말인가. 대출안내나 대리운전, 게임안내 같은 스팸문자는 받아봤지만 이런 황당한 문자는 생애 최초였다. 그래도 처음엔 별 우스운 도둑놈도 다 보겠군, 하며 피식 웃고 말았다. 머리털이 아닌 겨드랑이 털을 가져가겠다니 약간 귀여운 구석까지 있는 양반이 아닌가. 나는 다시 노트북을 바투 끌어당겼다. 한데 소설의 줄거리는 난데없이 사라지고 머릿속에 털만 수북하게 솟아오르는 게 아닌가. 도대체 '괴도 겨털'이란 놈이 누굴까? 왜 제 맘대로 '문자질'을 해서 야밤에 내 귀한 겨드랑이 털을 한 가닥도 아닌 다섯 가닥이나 뽑아가겠다는 걸까? 도저히 그냥 웃고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녀석의 정체라도 알아야 할 것 같았다. 밀어두었던 휴대전화를 다시 거머쥐었다. 한데, 엥? 발신번호가 1004라니. 남의 터럭을 훔쳐가는 양상군자 주제에 이딴 '닉'을 쓰다니. 이런 발칙한 '시베리안 허스키에 십장생' 같은 녀석을 봤나. 속에서 냄비 끓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화를 풀 길이 막연했다.

사실, 나이가 들면 털 한 가닥에도 신경이 곤두선다. 출근을 위해 머리를 감을 때마다 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머리칼을 다시 심고 싶을 정도로. 하긴 누가 알았을까. 젊은 날에는 신경도 쓰지 않던 머리카락에 이렇게 집착하게 될 줄을. 나날이 가늘어지고 빠지기 일쑤니 어쩌면 터럭 하나가 자식보다 귀하다. 한때 오솔길 같은 가르마가 내가 헤쳐 나가야 할 인생길 같아 생각이 깊어졌다면 이젠 고속도로처럼 넓어진 가르마가 허허벌판 같아 허무해진다고나 할까. 그러니 거울 앞에서 자주 서고 오래오래 서 있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이렇게 귀한 털을 뽑아가겠다니.

당신 글 안 쓰고 뭐해? 아내가 방으로 들어오면서 두 눈을 비상등처럼 깜빡거렸다. 남편이 글을 쓰는데 방해할까봐 거실로 피정했던 아내였으니 당연한 질문이었는지 모른다. 응, 이상한 문자 땜에. 무슨 문잔데 그래? 아내는 문자 내용을 제 눈으로 확인하고 말 것처럼 달려들었다. 그러더니 이내 피싯, 소리를 내며 입을 연다. 난 또, 무슨 부의문자라도 온 줄 알았네? 시큰둥한 아내의 반응에 내가 되쏘아 붙였다. 이건 부의보다 더 심각한 문자라구, 어떻게 남의 겨털을 뽑아간다고 장난질을 할 수 있어? 아내는 태연했다. 화내지 말고 그냥 문자위복으로 생각하면 되잖아. 그 왜 있잖아 '클래식개그'지만 공중전화 건 뒤 수화기를 내리면 댕그렁, 하고 동전이 다시 튀어나오는 그런 때를 '전화위복'이라고 하는 것처럼 그냥 문자를 복으로 삼아라 그 말이지.
아내는 제 할 말을 다했다는 듯이 침대로 향했다. 탈모방지 샴푸를 권하던 그런 사랑스러운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나이 들면 머리털 하나도 귀한 때인데 이런 문자를 받고 문자위복이 가능해? 아내를 향해 언성을 높였다. 아내는 별 일 아니라는 듯이 다시 심드렁히 대꾸했다. 생각해봐, 12시까지 잠들면 겨털을 뽑아가겠다고 했으니까 안 자면 되잖아. 창작열을 고취시키기 위해 동료작가가 부러 보내준 격려문자라고 생각하면서 말야. 아내는 그 말을 끝으로 등까지 돌려버렸다. 그런 아내를 지켜보자 불현듯 오래 전에 읽었던 문자 메시지에 얽힌 이야기가 떠올랐다. '저 오늘 면접 보러 가요. 용기 좀 주세요' 하고 날아온 엉뚱한 문자. 낯선 사람으로부터 문자를 받은 사람은 처음에는 황당했다고 했던가. 하지만 이내 '면접 잘 보세요. 아자 아자!' 하고 답장을 보냈더란다. 취업을 앞둔 젊은이는 얼마나 초조하고 다급했으면 엉뚱한 사람에게 문자를 보냈을까 싶어서. 어쩌면, 뜻하지 않은 답장문자를 받은 당사자는 용기를 얻었을지 모른다. 아내의 말이 맞을지 모르겠다. 나쁜 쪽으로 생각하면 한없이 나빠질 수도 있으니까. 재앙 같은 저주를 복의 기회로 삼으면 되니까. 그래, 괴도 겨털아! 12시까지 글에 매달리마. 고맙다, 힘내게 해줘서.

소설가

[국제신문 공식 페이스북] [국제신문 인스타그램]
  • 기사주소복사
  • 스크랩
  • 인쇄

많이 본 뉴스 RSS
  • 종합

  • 정치

  • 경제

  • 사회

  • 스포츠

부산정치인의 말말말
부산정치인의 말말말-오거돈 부산시장
부산정치인의 말말말
부산정치인의 말말말-박인영 부산시의회 의장
강동수의 세설사설 [전체보기]
새해 개천에서 용이 나려면
1919년 그리고 100년, ‘잡화엄식(雜華嚴飾)’을 꿈꾼다
강동진 칼럼 [전체보기]
농업이 도시로 들어오고 있다
북항은 진정한 부산의 미래가 되어야 한다
기고 [전체보기]
미래 수산식품산업을 생각하며 /남택정
진실의 순간(MOT·Moment Of Truth) /빈대인
기자수첩 [전체보기]
깨지지 않은 ‘서부산 징크스’ /임동우
부산시의 가덕신공항 배수진 /김해정
김용석 칼럼 [전체보기]
‘반려동물’ 수난 시대
‘스마트’하게 살지 않을 권리
김정현 칼럼 [전체보기]
기꺼이 불효를 저질렀습니다
삶의 존엄, 죽음의 존엄
김지윤의 우리음악 이야기 [전체보기]
국악 선입견과 마주하기
제례악에 내포된 음양오행 사상
뉴스와 현장 [전체보기]
中企를 위한 금융은 없다? /정유선
김복동을 잊지 말자 /이병욱
도청도설 [전체보기]
로저스의 방북
역사왜곡처벌법
문태준 칼럼 [전체보기]
자기 표현의 기술
신춘문예 당선 소감을 읽으며
박무성 칼럼 [전체보기]
국민의 눈높이
‘밥 한 공기 300원’의 미래
박상현의 끼니 [전체보기]
포르투갈 리스본의 에그타르트
진화하는 통영 꿀빵
사설 [전체보기]
새 국면 맞은 신공항, 부산시 치밀한 전략이 관건
수빅 리스크 해소 한진중, 뼈 깎는 자구책 마련을
이상이 칼럼 [전체보기]
생계급여 수급 노인과 ‘줬다 뺏는 기초연금’
출산 절벽시대 ‘인구 장관’ 필요하다
이은화의 미술여행 [전체보기]
기절을 부르는 비너스
미술관을 지키는 강아지
이홍 칼럼 [전체보기]
개념도 정리 안 된 ‘4차 산업혁명’
장재건 칼럼 [전체보기]
되살아나는 박근혜의 그림자
보행친화도시로 가는 길
조영석의 음악이야기 [전체보기]
발랄라이카와 닥터 지바고
최태호의 와인 한 잔 [전체보기]
프랑스와 미국의 와인전쟁
포도의 변신은 무죄
황정수의 그림산책 [전체보기]
단발령에서 바라본 금강산
  • 복간30주년기념음악회
  • 어린이극지해양아카데미
  • 유콘서트
경남교육청
클레이아크 김해미술관
해맑은 상상 밀양
걷고 싶은 부산 그린워킹 홈페이지
국제신문 대관안내
스토리 박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