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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숲길] 매화와 방사능 /김수우

첨단 물질로 너무 꽉 찬 현대문명

텅 빈 가지에서 핀 꽃망울을 보면서 빈 자리를 배운다

  • 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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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1-03-25 21:22:20
  •  |  본지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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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 첫 주, 하동 친구가 몇 아름 매화를 보내왔다. 봄이 배달된 것이다. 방울방울 총총히 맺힌 망울들이 풋풋했다. 얼마나 먼 데서 당도한 눈빛일까. 볼통한 눈매들이 모든 번뇌를 씻어주었다. 며칠 지나 여기저기서 꽃잎이 터져나오기 시작할 무렵, 일본의 재앙 소식이 닥쳤다. 그야말로 아득한 지구의 과거와 미래를 한꺼번에 환기하는 충격이었다. 삼월이 다가도록 안절부절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헤아리는 중이다.

이번 봄은 정녕 인류에게 잊지 못할 슬픔의 언덕이리라. 아무리 무너져도 지진과 쓰나미라는 자연재해는 한 세대면 어느 정도 제자리를 찾는다. 그에 비해 원전 사고라는 문명의 재난은 극복이 어렵고 상처가 너무 깊다. 매화가 피어나는 내내 그 순결한 눈부심과 방사능 피폭이라는 두려운 용어가 계속 교차했다. 이쯤에 이르면 우리가 무엇을 반성해야할지 분명한 게 아닐까. 함부로 누리는 실용적 가치와 편리주의, 원전에너지는 이러한 최첨단 소비문명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이었다. 물질에 잠식된 영혼들은 이제 무엇을 깨닫고 실천할 것인가.

물론 언제나처럼 인간은 최선을 다해 모든 위기와 싸울 것이다. 하지만 고난과 맞서 싸우거나 고난을 뚫고 나오는 것을 자랑하는 건 위험하다. 인간승리를 말하는 것은 오히려 덫이 될 수도 있다. 투쟁과 승리로 일관된 문명은 지배중심의 오만한 사회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고난을 통해 얻어야할 것은 절망의 밑바닥과 허무 속에 있는 맑은 눈동자이다. 그 맑은 눈으로 다시 경외를 회복하고 본래를 인지할 때 고난은 겸허한 유대를 선물한다.

공자는 깨달음을 생이지지, 학이지지, 곤이지지, 세 종류로 살폈다. 생이지지란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자연성, 학이지지란 배움을 통하여 아는 세계, 곤이지지는 고생고생 힘들여서 온몸으로 삶을 배우는 경지를 말한다. 문제는 무엇을 배우느냐일 것이다. 고단함을 통해 배우는 것은 새로운 그 무엇이 아니라, 아마 태생으로 품은 본래적 우주가 아닐까. 빈 손 말이다. 오늘 문명은 너무 꽉 차있다. 무수한 이슈로 복잡하고 또 복잡하다. 이제 빈 곳을 찾고 싶다. 넘치지 않는 삶, 스스로 절제하는 삶, 빈 자리, 이는 바로 자발적 가난이다. 강제적 빈곤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새로운 선택에 용감해야 하지 않을까. 고통은 자아를 비워내는 힘이다. 고난에서 사랑을 배우고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음이다. 그것이 곤이지지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꽃을 피워주는 마음이 중요하다. 서로 꽃을 피워주는 데는 빈 자리가 우선이다. 이는 단순한 마음을 의미한다. 단순한 마음이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순수하기 때문이다. 복잡한 마음은 바쁘게 움직여도 실제적으로 많은 일을 하지 못한다. 봄빛을 팽팽하게 당기는 꽃잎을 떠올려보라. 매화가 환한 것은 텅 빈 가지로 북풍한설을 견뎠기 때문이다. 온전히 비었을 때 진정한 생명은 맑은 꽃망울로 부풀어 오른다. 집착은 순수를 빼앗는다. 포기할 것 포기하고, 되돌릴 것 되돌리는 용기는 순수를 향한 의지 그 자체가 아닐까.
이제 벙글 대로 벙근 매화향기는 백년어서원의 계단을 그득 채우고 있다. 언제까지 이렇게 매화향이 만발할 수 있을까. 미래의 모든 봄도 늘 눈부실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해운대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있다가 하동 산골에 들어가 매화밭을 지키고 있는 친구는 참 현명하다. 부럽고 고맙다. 따라하지 못하는 나는 중앙동 원도심이 나의 매화밭이라는 생각을 한다. 거기서 매화를 닮은 선한 사람을 만나고 향기를 나누는 꿈을 꾼다. 인간사회에서 꽃이란 서로의 빈 자리를 통해 피어나는 눈빛이기에.

방사능이 떠도는 봄하늘, 밥상까지 위협받는 이 봄이 아프다. 환한 매화가 더 서럽다. 이번 고통을 통해서 우리는 더 투명한 눈동자를 가져야 하리라. 평안을 상실한 시대, 방사능도 두렵지만, 불안이라는 정신적 물질이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 일상을 폐허로 만들지는 않았는지 조심스레 응시해 본다. '어디로 가야할지를 모르겠거든, 어디서 왔는가를 기억하라'는 아프리카의 한 속담은 이 시대를 향한, 자연의 오래된 목소리임이 분명하다.

시인·백년어서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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