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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제도적 민주주의의 한계 /전진성

일사불란한 체제보다 끊임없는 문제제기로

합의 도출하는 사회가 민주공화국의 토대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1-03-20 20:19:34
  •  |   본지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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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나라 일본의 대지진 소식에 우리는 거듭 놀라고 있다. 전대미문의 강도와 규모도 그렇지만, 재앙에 대처하는 일본인들의 태도가 더욱 놀랍다. 감정을 절제하고 질서를 지키는 국민들, 그리고 선정적 보도를 자제하고 비상 매뉴얼을 준수하는 방송은 세계인들로부터 칭송과 지지를 얻고 있다. 특히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는 일본 문화는 우리에게 자성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혹여 우리사회 일각에서 이번 사태를 빌미로 국가적 '위기'의 상황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것이 선진 민주국가의 척도인 것처럼 곡학아세하는 풍조가 생기지 않을지 염려된다.

사실 우리 방송은 벌써부터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있다. 대지진 발생 일부터 국영방송의 9시뉴스는 사태를 극히 상세하게, 물론 일본보다 훨씬 자극적인 논조로, 전하다가 어느새 곧바로 스포츠 뉴스로 넘어간다. 이 바람에 국내 정치, 사회적 이슈들은 실종되고 만다. 물론 일본 대지진은 일국 차원의 재앙이 아니라 지구의 자전축이 변화될 만큼 심각한 지구적 사건이며, 아직도 진행 중인 후쿠시마 원전 폭발은 당장 우리나라에도 직접적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시급한 사안이므로 우리 방송이 음흉한 편집의도를 가졌다고 믿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9시뉴스는 우리나라가 아랍에미리트와 사상최대 규모의 유전개발참여 계약을 체결하여 엄청난 원유를 확보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이 쾌거가 모든 일을 진두지휘한 대통령의 치적임을 강조했다.

대한민국은 자타가 공인하는 민주공화국이다. '위기'에 대처하는 '일사분란함'이 그 기준이라면, 이미 IMF 재정위기의 극복으로 증명되었듯이, 일본 못지않은 선진 민주국가임이 분명하다. 더구나 지구상의 수많은 '후진국'들과 비교할 때, 우리 조국의 위상은 더욱 분명해진다. 아랍 사태를 보라. 국민들의 민주화 열풍을 온갖 폭력과 더러운 수단을 동원해 짓밟는 추악한 정권의 말로를. 특히 리비아 카다피 정권의 야만적 폭거를 전해 들으며 얼마 전까지는 우리도 거의 저 수준이었지 하며 안도의 한숨을 짓게 된다.

이제 대한민국에 무바라크나 카다피 같은 후진국형 독재자가 등장할 여지는 전혀 없다. 그렇지만 낙관은 이르다. 가시적인 국가폭력이 사라지고 적법한 절차에 따른 선거가 치러진다고 해서 곧바로 민주공화국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웃나라 필리핀을 보라. 벌써 수십 년 전 마르코스 독재체제를 극적으로 무너뜨리고 아키노의 '민주정권'이 들어섰지만 사회적 불평등은 전혀 줄어들지 않고 국민 대다수의 삶은 여전히 피폐하다. 세계에서 가장 잘 살고, 적어도 아직까지는 가장 강력한 미국을 보라. 세계 최초의 민주공화국으로, 민주주의의 전도사를 자처하며 세계 정계를 주무르고는 있지만 정작 제 나라에서는 국민의 상당수가 의료, 교육, 재정적 사각지대에 방치되어있다. 우리나라를 보자. 국민 대다수가 동의하기 힘든 법안들을 작년에 여당이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날치기 법안통과야 적법지 않겠으나 사실 국회의 다수가 표수로 실력행사를 하는 것 자체는 실정법적으로 문제가 없다. 잘못은 이런 자들을 대표로 뽑아준 국민에게 있다.

작금의 아랍 민주화 열풍을 논하는 정치학자들은 자주 제4의 민주화 물결이니 제5의 물결이니 하면서 한국의 민주화를 그 이전의 물결에 속하는 것으로 쉽사리 정리해버린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이미 민주주의를 실현했는가? 대통령의 독선과 '보은인사', 방송장악을 통한 혹세무민 등등은 정권 바뀌면 그만이라 쳐도, 해외에서 외교 대신 어리숙한 불장난으로 혈세를 탕진하고 국내에서는 우리 국민에게 폭행당한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거꾸로 구금하는 공공기관들, 동남권 신공항 입지선정을 놓고 제 몫이라고 싸움을 벌이거나 도덕적 해이에 빠져 이해타산만 맞으면 만사형통인 우리 국민의 구름 진 '천심'을 어찌 봐야할 것인가?

민주주의는 제도적 절차에 국한되지 않는다. 관건은 오히려 국민의 '수준'에 있다. '일사분란함'의 수준이 아니라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고 논의할 수 있는 수준이다. 아마도 현재 대한민국을 민주공화국으로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민주주의란 특정한 헌정체제가 아니라 그러한 체제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제기할 자유와 가능성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부산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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