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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숲길] 참, 이상한 말 /이상섭

"사랑해" "사랑해요" 나, 우리, 세상을 바꾸는 한 마디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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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0-12-17 21:00:20
  •  |  본지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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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토요일이었다. 오줌보가 탱탱하도록 늦잠을 잔 뒤, 거실로 나와 신문을 펼쳐들었다. 뻐근한 목이며 허리를 풀면서 신문 기사를 읽을 때였다. 순한 짐승 같은 소파 위로 난데없는 '언어폭탄' 하나가 날아와 떨어졌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그 소리가 '콰콰쾅'이 아니라 '사랑해'라는 것 뿐이었다. 그러고도 아내는 햇빛보다 눈부신 웃음까지 만들어 보이며 능청이었다. 아니, 이 여편네가 무슨 114안내원도 아니고 아침부터 이 무슨 해괴한 수작이람? 싶어 눈만 치떴다.

오리지널 자연산 경상도 태생 남편의 비감성적 반응 탓일까. 아내는 평상시처럼 쫑알거리지도 않고 돌아섰다. 그 바람에 나는 다시 신문에 눈길을 주었다. 헌데, 활자는 안중에 없이 갑자기 머릿속이 발전기마냥 사정없이 돌아가는 게 아닌가. 가만있어봐, 오늘은 무슨 기념일인가? 결혼기념일은 4월이니 아니고 아내의 생일도 아니다. 그렇다고 아이들 생일도 이미 지났잖은가. 그렇다면 새집으로 입주한 날인가? 이사 온 건 1월이었으니 아직 멀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사랑해, 라는 낡은 어법을 구사한 거지? 서방의 몸과 마음을 통째로 감동 먹이기로 작정이라도 한 것일까. 꿍꿍이 속을 이리 재고 저리 가늠해 봐도 도통, 측량 불가였다.

아내는 태연했다. 아침 식사 때에도, 같이 모닝커피를 마실 때에도 별다른 말이 없었다. 간단하게 아파트 뒷산을 오르자는 말도, 가구를 옮겨 달라는 말도, 온 가족이 저녁에 외식이라도 하자는 말도 없었다. 이 여편네가 언제 자기 속내를 드러내려나 싶어 아내의 눈치만 살폈다. 아내는 조금 전에 한 말을 잊었다는 듯이 빨래를 널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기를 돌렸다. 그 바람에 늘 하던버릇 대로 나 또한 목욕가방을 챙겨들고 말았다. 헌데 현관을 빠져나가는 내게, 잘 갔다 와, 사랑해! 하며 또 소리 치는 게 아닌가. 무슨 앵무새도 아니고 같은 말을 반복하다니. 도대체 저 저의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다고, 우리가 뜨거운 열애주간을 설정하고 살아가는 신혼부부도 아니잖은가.

피로를 풀어야 피의 속도도 정상이 된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그래서 목욕을 즐긴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뭐랄까. 사랑해, 하던 아내의 말에 놀라 뜨거운 물속에 풍덩 빠진 기분이라고나 할까. 그녀가 왜 뜬금없이 사랑한다는 말을 반복하는 것인지, 오늘따라 과소비하는 저 미소는 또 무슨 연유인지 생각하느라, 때조차 민 건지 안 민 건지 분간이 서지 않았다. 아무튼 탈의실로 나오니 TV에서는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 퍼지는 중이었다. 그런 탓일까. 며칠 전 아내가 했던 말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에 그런 이야기 있잖아.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 그 피가 사랑하는 여인의 집까지 흘러왔다는. 그 대목을 읽으면서 사랑이야말로 인간이 지닌 가장 아름다운 감정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낯선 우리가 만나 가족이란 울타리를 만든 것도 사랑의 힘이었잖아. 게다가 가족 간의 사랑이 넘치고 넘쳐 사회로 흘러나와야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 수 있고, 안 그래?"

그렇다면, 아내는 사랑의 물꼬를 내 가슴에 파기로 작정한 것일까. 그래서 세상으로 사랑이 퍼져 나가길 원한 것일까. 그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사물함에 놓아둔 휴대폰이 몸을 떨었다. 고향에 계신 노모였다. 통화버튼을 누르자마자 어머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뜸 목청을 높였다. 너그 식구들은 죄다 휴대폰을 들고 댕김서 와 안부전화 한 통 없노? 아, 예. 연말이라 그런지 이상하게 마음이 바쁘네요. 그러자 어머니는 예의 습관대로 넋두리를 풀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휴대폰 속의 어머님을 한적한 곳으로 모셔가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한동안 장광설을 풀어놓은 다음에야, 바쁘다니 긴말 못하겠고 모레 김장할 끼다, 후딱 가져가래이, 하는 게 아닌가. 잔소리가 끝났다는 해방감 탓인지, 올해도 어김없이 김장김치를 나눠주는 마음에 감복한 탓인지, 어머님, 고마워요 한다는 게 그만 어머님, 사랑해요 하는 말이 터져 나오고야 말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런 상황도 모른 채, 야가, 지 마누라한테 할 말을 에미한테 하누먼! 하곤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지던 웃음소리만은 끊지 못했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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