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인간으로서 기본적 권리를 가진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고 정면에서 반박하는 이를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질문을 약간 비틀면 어떨까? "이주노동자도 인간으로서 평등한 기본적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일 뿐인데도 대답이 달라질 가능성은 충분하다.
지난 달 이주노동자의 작업장 이동을 3회로 제한하고 있는 '외국인근로자의 고용 등에 관한 법률'을 두고 제기된 헌법소원에 대한 공개변론이 열렸다. 공개변론까지 열린 것은 이 사안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헌법소원의 청구인은 작업장 이동 횟수를 제한한 규정이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 즉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및 행복추구권, 계약자유의 원칙, 평등권, 직업선택의 자유, 근로의 권리를 침해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이해당사자인 고용노동부는 횟수제한을 풀면 이주노동자들이 더 좋은 일자리를 찾아다닐 것이므로 임금이 상승하고, 영세 중소기업에 안정적인 노동력을 공급할 수 없게 된다는 논리로 맞섰다.
2004년 도입된 고용허가제는 말 그대로 기업주가 이주노동자를 고용하는 것을 허가하는 제도다. 따라서 이주노동자가 작업장을 선택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금지되어 있고, 이는 이주노동자가 일할 수 있는 업종의 제약 뿐 아니라 작업장 이동 횟수 제한, 작업장을 이동할 때 3개월의 기한 제약 등의 규정으로 현실화됐다. 이런 규정들은 이주노동자가 임금체불이나 열악한 근로조건, 심지어 폭행 등의 부당한 대우를 당해도 사업장을 옮길 수 없어 현실적으로 강제노동을 강요받게 될 뿐 아니라, 이주노동자들이 주로 일하는 곳이 경기변동 등 외부여건에 따른 부침이 극히 잦은 영세사업장인 데도 이를 고려하지 않은 너무 경직적인 규정 때문에 결국은 불법체류를 부추기게 된다는 등의 문제 제기를 받아왔다.
고용노동부는 작업장 이동 횟수제한이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을 침해한다는 청구인의 의견을 직접적으로 반박하지 않았다. 고용노동부의 반박논리에는 기본권이 침해되더라도 이주노동자라면 상관없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래서 이 사안의 쟁점은 이주노동자가 헌법에서 보장하는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권리를 누릴 주체가 될 수 있는가에 모아지고 있다.
지금이야 모든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권리, 즉 인권을 가진다는 사고가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까마득한 옛날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인권의 개념은 역사를 더듬어 보면 18세기 계몽운동 시대에 등장해 더디고 힘든 과정을 거치며 진보했고 유엔총회가 1948년 12월 10일 세계인권선언을 선포한 순간 적어도 이론적으로나마 사람들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보편적 권리에 의해 인간을 정의하게 되었다. 그러나 인권의 실현은 언제나 국가의 장벽 안에서만 가능했다. 추상적인 인권은 특정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일정한 실정법적 권리로 구체화되었고 멤버십을 가진 성원만 그 권리를 누릴 수 있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인권을 가진다는 사상은 거의 언제나 사회구성원 일부의 권리로부터의 배제와 공존해 왔다.
지금은 흑인이 대통령인 미국에서조차 건국 당시 국민은 사실상 백인 남성들로 구성된 공동체로 규정되었고 여성, 인디언 원주민과 흑인 노예가 법적인 권리를 획득하는 데도 100년 이상 걸렸다. 여타 민주주의 국가들도 수세기 동안 어떤 사람들에게는 권리를 부여하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써 불평등을 제도화해왔다. 권리가 없는 사람들은 여성이거나, 노예거나, 식민지 주민이거나 인종적·종족적 소수민이었다. 권리에서 배제된 이들은 늘 더 적은 대가와 고된 노동으로 사회를 밑바닥에서 떠받치는 역할을 해왔다. 그런 만큼 이런 그룹의 참여를 보장하고 확대하는 것은 인권의 진보와 민주주의 문을 여는 열쇠로 여겨져 왔다. 21세기에 성이나 인종에 기초해 차별을 제도화하고 있는 국가는 찾기 힘들어졌다. 그러나 이전에 성과 인종이 차지하던 역할을 이제는 국적이 대신하면서 차별은 여전히 완고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노동력을 불렀는데 온 것은 인간이었다. 이주노동자들 또한 인간임을 인정할 것인가? 우리 사회는 이 질문에 어떤 답을 해야 할까?
이주와 인권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