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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숲길] 내가 나에게 주는 휴가 /배유안

외국여행서 만난 獨 모녀의 사랑, 그 느꺼운 깨침 후 힘껏 딸 이름 불러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0-11-12 20:57:24
  •  |  본지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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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요카(malloca), 스페인 본토와 뚝 떨어져 있는 이 유유하고 한적한 섬이 내가 나에게 준 한 달 휴가의 첫 목적지, 한 해 내내 일에 쫓기다가 적잖은 무리수를 두고 짐을 꾸린 후 사흘 만에 도착한 곳이다. 한 달 일정의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 것으로 일상을 떨쳐버린 나는 옛 친구가 살고 있는 프랑크푸르트 인근의 소도시에 짐을 풀고 이틀을 빈둥거렸다. 막상 떠나오고 보니 무리수 어쩌고 할 게 하나도 없었다. 사방에 버티고 있던 '꼭', '어쩔 수 없는' '다음 주까지는 반드시' 등의 수식어들이, 이미 떠나온 다음에는 마른 나뭇잎처럼 바스러지면서 모든 것들이 얼마든지 미룰 수 있고, 취소할 수 있고, 바꿀 수 있는 것들로 순순히 제자리를 잡아버리는 것이었다. 붙들고 있었던 게 우스울 정도로.

굽이굽이 해안가가 깨끗하고 아름다운 이 한가로운 섬은 도시 중심부의 엄청난 대성당 말고는 유럽의 다른 도시들에 비해 별다른 유적지는 없지만 독일인들이 가장 즐겨 찾는 휴양지라 했다. 아마도 절반 이상의 이유가 날씨 덕분이 아닐까 싶도록 한국의 가을 하늘처럼 맑고 드높아서 하루 걸러 우중충한 독일과는 딴판이었다. 한국의 청명한 햇살 맛을 평생 보아온 내가 그 때문에 매혹될 리는 없고 그저 넘실대는 짙푸른 바다가 보이는 호텔 창가에서 발갛게 떠오르는 해를 보며 아침을 먹고, 낮에는 버스를 타고 나가 고만고만한 마을의 자잘한 볼거리를 기웃거리며 나흘을 지겹도록 빈둥거릴 참이었다. 지천으로 보이는 올리브나무를 건드리며 걷다가 오래 묵은 사람살이의 흔적에 무단히 애상을 느끼기도 하고, 더러는 평생 가죽에 무두질을 해왔음직한 눈매 깊은 구두장이 할아버지에게서 샌들을 사기도 하며 지내다 보니 일주일 전까지의 삶이 마치 까마득한 전생의 일처럼 가뭇해져버려 나에게 아들도 있고 딸도 있는 게 맞지? 하고 친구에게 묻기도 했다.

그런데 사흘째 날 저녁 식사 중에 한 쪽에서 해피 버스데이 노래가 터져나왔다. 돌아보니 손님의 생일에 웨이터들이 둘러서서 노래를 불러주고 있었다. 주인공은 북독일 하노버에서 왔다는 두 모녀, 삼십대의 딸이 어머니의 생일을 맞아 이번 마요카 여행을 선물한 사연이었다. 며칠간 한 호텔에서 아침저녁 얼굴을 맞대는 손님들이 다 같이 합창을 해주었는데 갑자기 친구가 평소답지 않게 용기를 발휘했다. 불쑥 그 자리로 가더니 '우리는 한국에서 여행 왔는데 한국말로 축하 노래를 불러주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환영의 박수에 노래에 젬병인 나도 폼을 잡을 수밖에. 듀엣으로 부르는 '생일 축하합니다'는 그들에게 분명 유창한 외국어, '사랑하는~'에서 성악가처럼 길게 빼고 '안겔라~'에서는 목소리를 높여 더욱 길게 빼고, 에라 모르겠다며 양팔 춤까지 흔들고 말았다. 같은 멜로디에 낯선 말의 축하노래는 특별한 감동을 준 듯 레스토랑 전체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나왔고, 그러잖아도 어머니인 안겔라의 눈에 한껏 차 올라있던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우리는 레스토랑 분위기를 잔뜩 고무시켜준 상으로 지배인으로부터 와인 한 잔씩을 선물 받았다. 이후, 복도를 오가며 마주치는 손님들로부터 더 자주 아는 체 하는 인사를 받았던 것도 물론이다.
그날 밤 나는 잠을 뒤척였다. 멀리 후루룩 떠나왔다고 일상을 떨친 게 아니라 저 멀리 두고 보는 관조의 자리에 내가 있었다. 딸의 여행 선물과 그 어머니의 눈물 때문에 딸이자 어머니인 나, 누군가의 누구인 나를 돌아보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던 것이다. 실수라고 한 것은 다분히 자책감에서 나온 말이다. 감동적인 글 하나 쓰고 싶다는 어쭙잖은 욕망으로 정작 일상에서 감동을 만들 기회를 애써 외면 혹은 차단해왔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딸들이 다 어머니와 깊은 교감을 나누지는 못하겠지만, 어쩌면 많은 경우 서걱대기도 하겠지만, 둘 사이에 없을 수 없는 근원적인 사랑을 끄집어 올리고 표현하는 것은 효(孝)의 미덕이기 이전에 그 자체로 미(美)가 아닌가 하는 깨침이 들어버렸으니 이제 다시 글 핑계를 댈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 밤의 뒤척임이 있던 다음 날, 나는 홀로 해안 절벽을 걷다가 가슴이 벅차올라 저 바다 끝이 어느 나라인 줄도 알 수 없는 아득한 방향을 향해 울음을 터뜨렸는데 정신이 들고 보니 어머니가 아니라 딸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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