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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칼럼] 단풍 상념(想念) /고기화

온몸 불사르는 비움의 철학

단풍 같은 임 그리워지는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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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김없이 단풍의 계절이 돌아왔다. 바야흐로 온 산하가 단풍으로 물들고 있다. 설악산과 오대산에서 절정을 맞은 단풍이 서서히 남하하고 있을 터. 이제 곧 가야산과 가지산, 부산의 금정산도 만산홍엽의 즐거움을 선사할 것이다. 가을 내음이 가슴을 설레게 해서일까. 하염없이 흐르는 세월의 무게를 견디기 어려워서일까. 엊그저께 아내가 설악산으로 단풍 산행을 갔다 왔다. 무박 2일의 여행. 기자 아내로 살아온 20여 년 만에 처음 가보는 단풍 여행이라며 들뜬 모습에 가슴 한쪽이 아려온다. 바쁘다는 핑계로 동행하지 못하고, 늦은 밤 기차역에 나가 배웅과 마중을 한 게 고작이다. 불현듯 삶의 여유를 찾기 어렵다는 불안이 엄습한다. 심산하다.

붉고 노랗게 단풍이 드는 이유는 뭘까. 가는 계절이 서러워서일까. 그래서 온몸을 불사르며 마지막 작별을 노래하는 건가. 절정기 고운 단풍은 '몰아(沒我)의 경지'라 할 만큼 아름답다. 그 화려한 만큼이나 고난의 시간을 보냈음이리라. 그러나 상식적으로 말하면 단풍은 나뭇잎의 소멸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기온 변화에 따른 나뭇잎의 색소 변화이다. 기온이 떨어지면서 잎과 가지 사이에 '떨켜'라는 세포층이 생겨나면서 더 이상 광합성 작용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란다. 그 틈을 타 숨겨져 있던 색소들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게 된다. 겨울을 나기 위한 나무의 월동채비인 셈이다. 나뭇잎은 단풍이 들면 곧 낙엽 신세가 되리니 왠지 울고 싶어진다.

곧잘 단풍은 인생의 황혼에 비유되곤 한다. 초록이 지쳐 단풍이 들듯 황혼의 노을은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가. 아름다운 늙음. 자기의 할 일을 다한 마지막이 아름다운 삶은 긴 감동을 준다. 황혼이 아름다운 건 해 저문 노을을 미소로 품을 수 있고, 삶에 고마움을 진정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단풍과 낙엽은 끝은 아니다. 새봄에 다시 돋아날 새싹을 기약하고 있다. 단풍이 진정 아름다운 까닭은 새 생명의 잉태를 예고하기 때문이리라. 새삼 생명에의 외경에 홀로 숙연해진다.

단풍은 무욕이나 빈손, 빈 마음과 동의어다. 버리고 비우지 않고는 새것이 들어설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일깨운다. 미움과 탐욕을 버리고 아름다움과 너그러움을 채우는 지혜를 들려준다. 이 계절에 듣는 도종환 시인의 '단풍드는 날'이란 시가 가슴에 딱 와 닿는다.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정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일상에 지친 삶일지라도 조금씩 조금씩 마음 비우기에 나선다면 다소나마 행복해지지 않을까. 가득한 욕심과 욕망이 내면을 지배하면 그만큼 삶도 힘들어지기 마련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란 말도 있지 않는가.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내는 것이다. 미련 없이 자신을 떨치는 단풍은 우리에게 자신을 비우고 버릴 수 있는 결단과 용기를 가지라고 깨우치는 듯하다. 추사 김정희가 말년에 썼다는 '홍엽산거(紅葉山居)'란 글귀도 단풍처럼 모든 것을 다 비우고 살리라는 텅 빈 마음이 아니겠는가.

문득 부산국제영화제와의 15년간 인연을 마감하며 표표히 떠난 김동호 전 집행위원장은 '단풍 같은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을 다했다"며 "사랑받으면서 떠날 수 있어서 행복하다"는 인사를 남긴 그의 뒷모습은 단풍만큼이나 아름답다. 디지털 캠코더 하나 장만해서 직접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 거라는 것도, 15년간 일해 온 사무실의 짐이 달랑 작은 여행가방 두 개라는 것도 단풍의 내면을 닮았다.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삶의 목적이 '행복'이라곤 하지만, 행복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살아가면서 마음속에 이는 욕심과 욕망이란 바람을 잠재우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이제 욕심을 버려야지 하면서도 잘 되지 않는 게 인생이기도 하다. 이럴 때 마음의 먼지를 씻어내고, 내 삶의 자리를 돌아볼 수 있게 하는 단풍이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은 위안이 된다. 깊어가는 이 가을, 주말엔 잠시 시간을 내 동네 산이라도 찾아 고운 빛으로 물들어가는 단풍의 마음을 헤아려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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