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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칼럼] 좋은 세상 오면 궂은일 누가 하나? /김재기

기술과 도덕성, 사회제도가 삼위일체여야 좋은 세상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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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0-05-19 20:48:27
  •  |  본지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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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5월이 오면 광주의 아픈 기억과 함께 좀 더 나은 세상을 꿈꾸던 젊은 날의 열정이 되살아나 가슴 한편이 뭉클하다. 시인 김광규는 빛바랜 4·19혁명을 회상하며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노래했지만, 그의 말처럼 오늘도 살아남은 이들은 가끔 부끄러움에 몸을 떤다. 개인적 회한의 감정을 풀어놓거나 어쭙잖은 역사 강의를 하려고 지난 일을 새삼 들추는 건 아니다. 다만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세상이 변해도 변치 않는 고민거리가 있는 법이고, 과거를 생각할 때마다 아직도 내 머릿속을 맴도는 고민이 있기 때문이다.

그 시절 친구들과 제법 심각한 토론을 할 때면 단골로 등장했던 게 바로 "좋은 세상이 오면 누가 똥을 푸나?"라는 주제였다. 생뚱맞게 무슨 소리냐 싶은 독자들도 있겠지만, 여기서 똥을 푼다는 말은 물론 "우리의 삶에 꼭 필요하지만 어렵고 힘들어서 아무도 안 하려는 일"을 상징한다. 그리고 어쩌면 '좋은 세상'이란 바로 그런 일들을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춘 세상이 아닐까 싶다.

당시 어설픈 난상토론 끝에 우리가 짜낸 대답은 크게 세 가지였다. 하나는 "좋은 세상이 오면 과학기술이 크게 발달하여 그런 골치 아픈 일들은 기계가 다 해결해준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삶의 편익을 위해 무조건 기계를 쓰고, 다시 그 기계를 돌리기 위해 엄청난 자원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현재의 문명이 언제까지나 인간의 어리석은 탐욕을 만족시켜줄 수 없으리라는 것은 굳이 환경론자들의 논리를 끌어오지 않더라도 자명한 일이다.

둘째 대답은 "좋은 세상이 오면 사람들 품성이 좀 더 도덕적으로 바뀌어서 모두 다 앞다퉈 똥을 푸려 하리라"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인간의 변화가능성에 대한 긍정적 신뢰가 담겨 있기는 하지만, 냉정한 눈으로 바라볼 때 분명 지나치게 낭만적이고 천진난만한 공상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마지막 답은 좀 더 현실적인 대안이었는데, 그건 "좋은 세상이 오면 모두가 차례대로 돌아가며 똥을 푼다"는 것이었다. 즉 사회제도로 문제를 해결한다는 발상이었다. 얼른 들으면 정의와 평등의 원칙을 충족시키는 데 이만한 방법이 없을 것 같지만, 조금만 더 따져보면 이 또한 추상적인 탁상공론에 불과하다. 고도로 전문화된 기능들이 복잡다단하게 얽혀 있는 현대사회를 운영해나가는 것은 설거지나 집안청소 따위를 분배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중국의 문화혁명이 보여주었듯이, 그 이상이 아무리 고상하다 해도 추상적인 평등원칙만 앞세우는 것은 극도의 혼란과 비효율을 초래할 뿐이며, 이는 결국 사회 전체의 퇴보와 모든 구성원의 고통으로 귀결되기 십상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우리가 이 문제를 풀 수 없다는 건 결국 '좋은 세상'에 대한 우리들의 열망이 허망한 꿈으로 남을 수밖에 없음을 뜻하는가? 사실 아무리 궁리를 해보아도 위에서 말한 세 가지 이외의 뾰족한 다른 대안은 없는 듯하다.

어쩌면 우리는 그동안 어떤 한 가지 절대적 원리만으로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거라 착각해왔는지도 모른다. 그게 발전된 과학기술이든 인간의 도덕적 품성이든 잘 정비된 사회 시스템이든 간에, 어떤 요술봉 같은 원리 하나가 모든 사회문제들을 해결해주는 황금열쇠가 될 거라 믿곤 했던 것이다. 하지만 단 하나의 원리만으로 근본적 문제들을 단칼에 해결하기에는 이 우주가 너무 복잡하고 다양하며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 또한 그러하다. 아니, 우리 인간 자신이 단순한 한두 가지 원리만으로 환원할 수 없을 만큼 다면적인 존재다. 따라서 결론은 싱겁게도 다음과 같은 절충안이 될 것이다.
'좋은 세상'이 오면 누가 똥을 푸느냐고? '좋은 세상'을 이루려면 가능한 한 똥 자체를 줄여 누군가가 그것을 푸는 수고도 줄여야 한다. 또 어쩔 수 없이 퍼야 한다면 기꺼이 그 고통을 나누려는 자세도 요구된다. 그리고 똥 푸는 이들을 배려해주는 제도나 규칙도 만들어야 한다. 물질문명과 휴머니티와 사회제도는 인간다운 삶을 떠받드는 세 개의 축이다. 그 어느 하나라도 온전치 않다면, 우리의 삶 또한 불구를 면치 못할 것이다.

경성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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