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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칼럼] 독일의 구스틀로프호와 한국의 천안함 /장희창

시민 사회가 깨어 있어야 사건의 진상 가릴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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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0-04-21 20:28:02
  •  |  본지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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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타닉호가 침몰했을 때 사망자는 1500명에 달했지만, 한꺼번에 9000여 명이 바다에 수장되었던 사건도 있다. 독일의 '빌헬름 구스틀로프'호 사건이 그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소련의 역공을 받은 독일이 후퇴하는 와중에 피란민과 부상병을 가득 태운 구스틀로프호가 1945년 1월, 발트해 연안에서 소련 잠수함의 공격을 받아 9000여 명이 배와 함께 수장되었던 것이다. 이 비극의 전모는 역사의 무덤 속에 매장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독일이 2차 세계대전의 가해자였으므로 자기들이 입은 피해에 대해서는 도의상 침묵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50년 이상 햇빛을 보지 못하고 있던 그 사건을 역사의 광장으로 이끌어낸 것은 '양철북'의 작가인 귄터 그라스였다. 그라스가 새삼스럽게 그 주제를 부각시켜 '게걸음으로 가다'라는 작품으로 형상화하게 된 이유는 무엇보다도 독일의 극우파들이 그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한 때문이었다. 나치의 역사에 대한 때 이른 망각과 더불어 극우파들이 독일의 범죄는 은폐하고 피해만을 강조하며 준동하는 것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평생을 과거사 청산에 몸 바쳐 온 작가 귄터 그라스가 네오나치즘, 스킨헤드족을 비롯한 독일사회의 우경화 징후에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파시즘 계열의 정치세력이 꿈틀거리는 징후를 사전에 차단하고 역사의 진실을 보여주려 한 것이 이 작품의 진의였다. 사건의 역사적 맥락을 다시 환기시킴으로써 그러한 비극을 초래한 것이 누구의 책임이었던가를 독일 시민사회에 경고했던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천안함 침몰사건으로 난리법석이다. 진실과 거짓이 섞여 어지럽게 난무한다. 극우파들이 남북 대결 분위기를 조장하고 있는 상황을 보면, 귄터 그라스의 우려는 한국 사회에 대입하더라도 적절해 보인다. 사건의 진상을 객관적으로 철저하게 조사하여, 엉성한 국방 태세를 점검하는 계기로 삼으면 될 일인데도 그러한 상식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과도한 애국주의가 범람하고 극단적인 대결주의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영해에서 벌어진 참사의 진상이 이처럼 밝혀지지 않는 것은 지금의 정치권력과 시민사회가 협조와 화해의 관계가 아니라 반목과 대립의 관계임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이다. 사태의 진실이 규명되지도 않은 터에, 수구 언론을 앞세워 자신들의 주도권 장악에만 골몰하는 수구세력과 깨어 있는 시민사회의 한판 대결로 나아가고 있는 형국이다.

귄터 그라스는 분단국가 한국에 많은 관심을 가진 작가이다. 2002년 월드컵 개막식에서 축시를 낭송하고 통일 세미나에도 참석하려고 한국을 방문한 그가 김포 공항에 내리자마자 찾아간 곳은 휴전선이었다. 좀체 흥분할 줄 모르는 대작가가 침을 튀기며 말했다. "저렇게 살벌하리라고는 짐작도 못했습니다. 내가 한국의 작가라면 평생 이 문제만 다루겠습니다. 남과 북은 형제입니다. 퍼준다, 퍼준다, 하지 말고 제발 많이 퍼주세요." 베를린 장벽에 익숙했던 작가의 눈에 휴전선의 실상은 판이하게 달랐던 것이다.
동서독에서는 분단 동안 서신 왕래가 중단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1967년부터 1974년까지 서독의 수상 빌리 브란트가 동방정책을 끈질기게 추진했고, 1976년 우편 협정, 1984년 문화협정을 맺었다. 정서적 결합과 실질적인 원조를 바탕으로 동서독을 화해의 장으로 이끌어갔던 독일의 일관된 통일 정책과 비교하면 남북의 대립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다. 귄터 그라스가 놀란 것은 바로 그 지점일 것이다. 같은 민족끼리 이렇게 우매할 수가 있나, 아마도 그런 심정이었을 것이다. 물론 독일도 탄탄대로를 달린 것은 아니었다. 파시즘의 뿌리는 쉽사리 근절되지 않았다. 그라스는 작품 속에서 그 점을 이렇게 토로한다. "지난 역사, 더 정확히 말해서 우리의 역사는 꽉 막힌 변기와도 같다. 우리는 씻고 또 씻지만, 똥물은 점점 더 높이 차오른다."

독일의 구스틀로프호 사건은 이제 역사의 햇살 아래 환하게 진실을 드러내었지만, 한국의 천안함은 점점 더 진실과 거짓이 착종된 미궁으로 빠져들고 있다. 시민사회가 제대로 깨어 있지 않으면 우리 사회는 또 한 차례 극복하기 힘든 대가를 치를지도 모른다.

동의대 독어독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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