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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숲길] 누군가에게 미안한 여행 /서진

샐러리맨 친구의 평범하고 열심인 삶…한가로운 내 여행이 미안해지는 순간

  • 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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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0-03-05 20:29:48
  •  |  본지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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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매력에 빠지게 되면 다시 여행할 기회가 쉽게 생기곤 한다. 믿을 수 없이 싼 비행기 표가 나왔다는 이유로, 어느 단체에서 후원을 해준다는 이유로, 집필을 위해 꼭 조사할 것이 있다는 이유로 떠나야 하는 것이다. 그런 기회가 우연히 생기는지, 우연을 가장해서 만들어지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런저런 이유로 미국을 자주 여행했고, 여행을 통해 한 권의 장편소설과 두 권의 여행 에세이를 집필했다.

이번 여행의 계기는 사뭇 달랐다. 친구의 회사가 워싱턴D.C. 근교의 회사와 일을 하는데 통역을 할 수 있겠느냐는 부탁을 받았다. 기간은 2월 한 달 정도, 보수도 나쁘지 않았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지만 이런 기회는 자주 오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게다가 작년 겨울 결혼을 한 뒤, 신혼여행도 가지 않았기 때문에 일이 끝나고 아내와 함께 여행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나는 고속도로 램프가 복잡하게 섞여 있는 미국 동부의 한 교외 지역의 사무실에 앉아 있게 된 것이다. 몇몇 세부적인 변경 사항과 일정 조정 때문에 사나흘 정도는 정신이 없었다. 회사 사람들의 이름을 파악할 수 있을 정도가 되자 주위를 살펴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작은 규모의 하이테크 회사라 그런지 출퇴근 시간이 자유로웠다. 하교하는 아이를 데리러 오후 다섯 시에 퇴근을 해야 한다는 핑계가 통했다. 오후 늦게 출근해서 새벽에 퇴근하는 사람도 있고 아예 집에서 근무하는 사람도 있었다. 별로 일을 하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다음 회의를 해 보면 분명 진전이 있었다. 엔지니어가 마음껏 기술 개발을 하는 환경을 갖는다는 것은 당연하게 보이지만 한국에서의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친구의 말을 들어보면 불필요한 회의나 잡무가 많아서 정작 일에 집중하려고 하면 저녁시간이 되어 버린다고 한다. 그래서 늦게 퇴근하는 일이 잦아지게 되고, 가족에게 소흘하게 된다. 일이 가정보다 중요하게 여겨지는 기업문화는 결국 누구를 위한 것일까?

한참 일을 하고 있는데 100년 만의 폭설이 찾아왔다. 부산에선 눈을 잘 보지 못하기 때문에 처음엔 반가웠다. 그러나 삼 일을 숙소에서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컵라면과 김치로 끼니를 때우고 있으려니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지구 반대편까지 와서 이게 무슨 청승이람. 이번 방문이 여행이었다면 폭설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당장 이곳을 떠나 따뜻한 곳으로 달려갔을 것이다. 그러나 보수를 받고 하는 일이기 때문에 폭설도 묵묵히 견딜 수밖에 없었다. 나를 부른 친구는 회사에서 이보다 더 심한 일도 10년 동안 묵묵히 견디고 있었을 것이다.
함께 눈 속에 갇힌 탓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10년 전 함께 대학과 대학원을 다닌 친구인데도 그동안 겪었던 일을 듣고 있으려니 점점 그가 낯설어졌다. 아니, 그가 조금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어디까지나 그는 정직하고 당당하게 일을 하고, 정당한 대우를 받고싶어 하는 엔지니어니까. 내 친구 같은 사람들이 묵묵하게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도 10년 동안 일을 하면서 점점 한계에 도달해서, 삶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기회를 갖고싶어 했다. 그럴 때 소설가 친구는 이상적인 조언자가 되지 못한다. 지극히 비실용적인 생활방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당장 직장을 때려치우고 일 년 동안 가족끼리 세계여행이라도 떠나라는 말을 농담처럼 건낼 수밖에 없었다. 사실은 진심이었다.

또 한 번의 폭설이 오고 몇 번의 회의를 거치자 약속했던 한 달이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 순조롭게 계약이 성사되어서 하드웨어를 한국에서 생산할 일만 남았다. 일을 마친 친구와 직원들은 한국으로 돌아갔다. 나는 아내와 약속한 대로 뒤늦은 신혼여행을 떠났다. 지긋지긋한 눈과 추위를 떠나 마이애미로 날아가 차를 몰고 미국의 최남단인 키 웨스트를 향해 달렸다. 사진엽서에나 나올 법한 푸른 바다와 섬들이 줄줄이 나타났다. 끝이 나지 않을 것같이 반복되는 경치를 시속 45마일로 계속 달리면서 나는 누군가에게 점점 미안해졌다. 처음엔 그 누군가가 먼저 한국으로 돌아간 친구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게 누구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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