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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은근과 끈기의 문화를! /정지창

문화품격은 돈으로도 못사…공들여 쌓아야만 겨우 도달할 수 있어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0-02-02 20:57:38
  •  |   본지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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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의 특성을 '은근과 끈기'라고 설파한 것은 국문학자인 도남(陶南) 조윤제 선생이다. 그는 은근은 한국의 미요, 끈기는 한국의 힘이라는 논지를 펴면서 지정학적인 근거를 제시한다. 즉 우리 민족은 산이 많고 들이 적은 동북아의 조그만 반도에서 끊임없이 대륙민족의 침입에 시달리다 보니 물질적·정신적으로 궁핍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환경적 요인에 의해 은근과 끈기라는 민족적 특성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도남 선생은 반달의 여백과 장구 소리의 여운을 예로 들면서 은근과 끈기의 미를 설명한다. "그런데 이 여백과 여운은 그 본체의 미완성을 말함일지 모르나, 그러나 그대로 그것은 완성의 확실함을 약속하고, 또 잘리어 떨어지지 않는 영원성을 내포하고 있으니, 나는 이것을 문학에 있어, 또 미에 있어 '은근'과 '끈기'라 말하고 싶다."

그러나 도남 선생의 수필 '은근과 끈기'가 발표된 이후에, 우리 사회는 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로 바뀌는, 아니, 푸른 바다가 시꺼먼 공업단지로 바뀌는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수천 년 동안 지속돼온 농경사회가 불과 한 세대, 30년 만에 산업사회로 탈바꿈했으니, 우리의 심성과 문화도 급격한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은근과 끈기의 문화는 세태 변화의 물결에 휘말려 호들갑과 조급증의 문화로 바뀐 것 같다.

이른바 개발독재의 시대를 거치면서 중단 없는 경제성장이 국시가 되고 '빨리빨리, 많이많이'가 한국인의 체질로 굳어진 느낌이다. 차분하게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것은 시간낭비로 여겨지고, 제철에 과일과 곡식을 거두는 것은 무능으로 손가락질을 받는다. 어디 그뿐이랴. 이제는 직행, 급행, 고속을 넘어선 초고속 논스톱으로 번갯불처럼 한 나절 안에 전국 어디서든 서울로 정보와 물자와 사람을 실어 나를 수 있는 전국일일생활권과 전국단일문화권이 현실이 되었다.

사람도 이제는 경제성장을 위한 인적 자원에 불과하다. 출산율 감소에도 경제성장과 관련지어 아이를 낳는 것이 곧 애국이라고 설교할 뿐, 낳아 키울 수 있는 살맛 나는 세상을 만드는 일에는 태무심이다. 모국어를 배우기 전부터 영어를 가르치고, 학원과외와 개인교습으로 논술능력은 물론이고 인성과 감성도 키워, 경쟁력 있는 인간제품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교육의 목표가 된 지 오래다. 그리고 이를 위한 사교육시장의 확장은 불황을 타지 않는 경제성장의 동력이다.

삼천리 금수강산은 가공되지 않은 원자재에 불과하므로 사람의 손과 기계의 힘을 투입하여 관광자원으로 개발해야 부가가치가 높아진다는 생각이 일반화된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이에 따라 천연의 자연을 깔아뭉개는 일이 전국방방곡곡에서 앞다투어 벌어지고 있다. 구불구불한 강줄기는 곧게 펴고, 흐르는 강물은 보로 막아 가두고, 강바닥은 파내어 유람선을 띄우는, 청계천식 인공하천을 만들어내는 일을, 4대 강 사업이라는 이름의 국책사업으로 국민의 혈세를 쏟아 부으며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다.

며칠 전 서울에 갔다가 세종로를 지나 서울역까지 오면서 나는 우리시대의 문화가 호들갑과 조급증의 문화임을 확인하였다. ○○랜드나 △△월드를 옮겨온 듯한 스케이트장의 흥청거리는 음악 소리를 들으며 터무니없이 큰 세종대왕이 왜소해진 이순신 장군의 뒤통수를 바라보고, 이순신 장군은 유리상자 속에 흉물스러운 고철덩어리들처럼 쌓아놓은 백남준의 비디오 기계(비디오 아트가 아니다)를 노려보는 광경은, 포스트 모더니즘의 혼성모방 기법을 연상케 하는, 일종의 시각적 폭력에 가까운 것이었다. 마치 부동산 투기로 돈을 번 졸부가 브리태니커 전집으로 벽면을 채우고, 추사의 낙관과 대원군의 낙관이 같이 찍힌 모조품 난초 족자를 걸어 놓은 듯한 모습에 나는 분통을 터뜨리다가 복원 중인 숭례문을 지나면서 결국은 헛웃음을 치고 말았다.

문화의 품격은 하루아침에 돈으로 처발라서 뚝딱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국민 다수가 반대하는 4대 강 사업과 세종시 수정안을 밀어붙여 임기 안에 끝내려는 조급증과 과시욕을 버리고, 눈앞의 이끗에 연연하지 않는 항심(恒心)과 역사를 멀리 내다보고 묵묵히 나아가는 근기(根氣)를 바탕으로, 한 땀 한 땀 공들여 쌓고 다듬어 나가야만 겨우 도달할 수 있는 어떤 경지를 일컫는 말이다.

영남대 독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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