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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숲길] 하산길의 여유 /배유안

천천히 내려오며 주변을 보는 여유…풍요로운 삶의 필수적인 조건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0-01-29 20:34:41
  •  |   본지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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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모 대기업 부사장이 자살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번엔 좀 다르다. 부정이나 횡령 등으로 '소환이 임박하여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운운'이 아니었다. 그는 뛰어난 능력으로 승승장구하다가 50대에 들어서 회사의 세대교체 방침으로 몇 년째 좌천된 것 때문에 우울해했다고 한다. 실상이야 드러난 것 말고도 그를 힘들게 한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심리가 이유인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회사에 기여한 공이 많은 사람이라 보유한 주식만 해도 수십 억대라는데 반환점을 돈 인생 여정에서 더 올라가지 못하고 내려간 굴욕감이 죽음으로까지 몰고 갈 만큼 그렇게도 컸던 것일까? 이제 다른 풍경의 길을 일부러라도 선택할 만한 때가 아닌가 하는 마음에서 이번의 죽음은 참으로 안타깝다. 인생이라는 산에서 자꾸 오르기만 하면 해 지고 어두워졌을 때도 숨이 찬 채 여전히 산에 있을 것 아닌가? 아직 해가 있을 때, 다리에 힘이 남아 있을 때 돌아서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가끔 산에 오르면서 나는 '오늘 4시간 정도 여유가 있으니 2시간 반쯤 올라간 곳에서 내려오도록 하자', 이런 식으로 계획을 세운다. 오르는 맛과 내려오는 맛을 다 즐기기 위해서 돌아올 길을 여유 있게 하고 싶어서이다. 이 길은 어떨까, 저 길은 어떨까 견주면서 천천히 내려오는 길은 오르는 길보다 더 넉넉하고 즐겁다. 올레길 등 산책길을 걸을 때에도 소개 글이 알려주는 시작점과 끝점을 지켜본 적이 없다. 내 다리가 약간 노곤하고 즐거울 만큼만 걷고 그만둔다.

예전에 인생은 마흔이 반환점이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다. 지금은 수명이 길어져서 쉰쯤이 아닐까 생각하지만. 어쨌든 나는 마흔이 되면 앞으로 나아가고, 위로 올라가고, 개척하고,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산 것을 가지고 글을 써야지 생각했다. '마흔이 되면 상당히 원숙해 있을 것이므로' 라는 생각은 완전히 착오였음이 나중에 밝혀지긴 했지만 그래도 예정보다 조금 늦게 나는 습작을 시작했다. 산으로 치면 오름길이 아니라 하산길로 문학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니 하산길에 있는 나의 문학은 꼭 이루어야 할 목표점을 가지고 있지 않고 그저 삶의 '즐김'일 뿐이어서 초조하지 않다. 게다가 천천히 내려오는 하산길의 삶이 진짜 삶이고 훨씬 풍요롭다는, 예전에 기대하지 않았던 덤까지 얻고 있는 중이다.

같은 날 같은 신문에서 멋지게 반환점을 도는 한 남자를 만났다. 48세의 스페인 최고 요리사 페란 아드리아가 식당 문을 닫는다는 기사에서였다. 영국, 프랑스의 요리전문지들도 세계 최고로 선정한 그의 레스토랑은 예약이 복권 당첨처럼 어려운 것으로 유명한데 그만 문을 닫겠단다. "고교 때 접시닦이로 시작해 25년 동안 죽어라 요리만 했으니 이제부턴 보통사람의 생활로 돌아가겠다"가 그의 은퇴의 변이다. 사실 그는 원래도 1년에 6개월만 일하고 나머지는 새 요리 연구에 몰두했다고 한다. 그의 반환점 이후의 삶을 기사로 또 볼 수 있으면 좋겠다. 2년 전, 후배가 나이 50에 들면서 25년간 몸담았던 학교를 명예퇴직하고 다른 삶을 선택했다. 늘 출근하던 시간에 학교가 아닌 도서관으로 출석을 하여 벼르던 공부도 하고, 이런저런 일을 벌이며 오름길에서 열심히 번 돈을 더 열심히 쓰고 있다. 그걸 보고 있자면 반환점 이후가 참 부자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하산길은 다 끝내고 무의미하게 돌아오는 길이 아니다. 그 자체가 오름길 못지않은 중요한 삶의 과정이다. 어쩌면 인생은 잘 올라가는 게 아니라 잘 내려오는 데에 더 많은 관심과 계획이 필요하지 않을까? 신문에서 먼저 만난 그 사람은 가족도 아니고, 돈도 아니고, 어디에 목숨보다 더 큰 가치를 두고 끝없이 올라가려 했을까? 무엇에 가치를 두었기에 느릿느릿 가족들의 손을 잡고 내려가는 행복을 즐기지 못했을까? 어느 지하철 벽에 걸려 있던 글귀가 생각난다.

"이 세상은 마치 어떤 장난꾼이 남의 상점에 들어가서 쇼 윈도에 진열된 상품들의 정가표를 바꾸어 놓은 것과 같다. 장난꾼은 비싼 물건에는 낮은 가격표를, 싼 물건에는 높은 가격표를 붙여 놓았다."

우리는 불필요한 것에는 필요 이상을 지불하면서도 절실히 필요한 것에는 마땅한 값을 지불하지 않는 건 아닐까?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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