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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숲길] 황금 들녘을 바라보며 /하창식

인간에 희생적인 쌀의 일생 보면서 서로 밥이 되는 삶을 생각해 본다

  • 국제신문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09-09-25 20:51:36
  •  |  본지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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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을 수도 볼 수도 없는 채 일생을 살아왔으면서도, 훌륭한 희생과 봉사의 실천적 삶으로 세상의 빛을 밝혔던 헬렌 켈러 여사. 단 사흘만 볼 수 있다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로 "친절과 우정으로 내 삶을 가치 있게 해준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싶다"고 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지에서 20세기 최고의 수필로 뽑힌 그녀의 '사흘만 볼 수 있다면'에 나오는 말이다.

가을이다. 수확의 계절이다. 아직도 초록빛이 드문드문 섞여 있긴 하지만, 금수강산의 들녘은 눈에 띄게 하루하루 황금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 곧 수확을 끝낸 벼들은 탈곡 과정을 거쳐 햇밥으로 우리 식탁에 오를 것이다. 농부들의 땀에 우선 깊은 고마움의 뜻을 전해야겠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내가, 농부들이 흘린 땀의 무게를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우리 식탁에 오르는 밥을 위해 봄부터 흘린 농부의 땀은 헬렌 켈러 여사가 받은 그 어떤 친절이나 우정 못지않게 큰 가치를 지닐 것이라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한 알의 볍씨가 내 입에 들어가는 밥이 되기까지 쌀의 일생을 보면서 삶의 지혜를 배운다. 볍씨가 쌀이 되기까지 겪는 아픔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가뭄과 홍수, 태풍 등의 자연재해는 물론이고 병충해나 참새들로 인한 피해의 아픔들을 겪고 살아난 볍씨만이 한 알의 쌀로 거듭날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볍씨는 탈곡과정을 거치며 껍질이 벗겨지는 아픔을 견디어 낸 후라야 한 알의 쌀로 탈바꿈할 수 있다.

쌀의 일생은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물에 의해 허물이 씻겨 나가고, 뜨거운 증기와 높은 압력을 견딘 후 밥이 되며, 우리 이빨에 의해 씹히고 위장운동에 의해 우리에게 살이 되고 피가 됨으로써 마침내 그 장한 생애를 마치게 된다. 쌀의 희생적인 한 생애에 비해 나만을 위해 버둥거리며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의 모습이 부끄럽지 않은가.

껍질을 깨는 아픔을 이겨내야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고, 자신을 내어 놓아야 행복하다.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에서 아프락사스라는 신을 향한 새의 비상을 그리며 말한다. "새가 알에서 나오려고 싸운다. 알은 곧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헤르만 헤세뿐인가. 트리나 포올러스는 어떻게 하면 나비가 될 수 있느냐고 묻는 애벌레에게 나비의 입을 통해 우리들에게 들려준다. "한 마리 애벌레의 상태를 기꺼이 포기할 수 있을 만큼 절실히 날기를 원할 때 가능한 일이란다." '꽃들에게 희망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이런 저런 문학작품들에서 우리들은 단순하지만 중요한 그 명제에서 배움을 얻고 있다. 그럼에도, 인간이기에 실천하기가 쉽지 않은 명제이다.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준다는 것, 자신이 가진 바를 완전히 포기한다는 것, 신이 아니고서야 불완전한 인간으로 어디 쉬운 일인가. 실천에 옮기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다.

하지만 인간이 가야할 길을 바르게 제시하고자 하는 문학작품들이 끊임없이 그려내는 주제인 만큼 그 바람직한 삶을 흉내라도 내다보면 조금은 내 삶이 더 나아지지 않겠는가. 내가 가진 것을 조금이라도 내어놓고자 하는 마음으로 오늘을 살아간다면, 자신이 가진 것의 일부라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삶을 실천할 수 있다면 오늘보다 나은 내일의 삶이 되지 않을까.

올봄 선종하신 김수환 추기경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서로에게 밥이 되어 주십시오." 어떻게 해야 서로에게 밥이 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황금 들녘을 바라보며 떠오른 생각이다. 한 순간이 아니라 평생을 두고 노력해야 얻을 수 있는 삶의 지혜가 아닐는지…. 이런 점에서, 위의 고전 작품들이 우리에게 주는 삶의 메시지는 매우 희망적이란 점이 고무적이다. 자신을 내어 놓는 삶을 위한 노력을 거듭하다보면 언젠가는 자신도 모르게 변화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때가 올 것이란 희망이 그것이다. 나다니엘 호손이 그린 '큰 바위 얼굴'의 주인공, 어니스트처럼.
오늘 나는 누군가에게 밥이 되어주고 있는가? 밥은커녕, 누군가를 씹어대는 못된 입 때문에 자신을 망가뜨리는 사람이나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부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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