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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숲길] 어린 손님 /정찬주

선의의 강요도 때로는 독

마음을 비우면 찾아드는 자연…자연을 맞아들이자

  • 국제신문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09-07-24 22:15:04
  •  |  본지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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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산책 코스를 바꾼 지 여러 날이 됐다. 먼 거리는 아니지만 의미가 깊은 코스다. 철감선사 사리탑을 반환점 삼아 내 산방으로 돌아오는 산길이다. 철감선사 사리탑은 국보 57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는 빼어난 석조물이다. 나는 누군가에게 묵은 빚을 갚는 마음으로 사리탑을 한 바퀴 돌고 온다. 산방 부근에 고승의 사리탑이 있다는 것은 값을 헤아릴 수 없는 정복(淨福)이다. 산방으로 돌아오면서는 대개 하루 일과나 찾아올 손님을 한 번 생각해 본다. 오전에 올 내 산방의 손님 중에는 고등학교 1학년인 학생이 있다.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가 사정이 생겨 서울 소재의 고등학교에 복귀한 학생인데, 왜 그 학생이 내 산방으로 굳이 오겠다고 했는지 궁금하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부모와 함께 와 산방 주위에 날아다니는 반딧불이도 보고 풍뎅이도 보았던 추억을 잊지 못해 내려오고 싶어 했을까. 그때 그 아이를 데리고 온 아버지는 모 출판사 사장이다. 출판사 사장은 나에게 원고를 청탁하러 왔을테지만 그 아이는 내 산방 주위의 자연을 마음껏 접했을 것이다. 그날 밤 출판사 사장에게 했던 말이 문득 떠오른다. '나에게 무엇을 가지고 가려고 하지 말고,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을 버리고 가시오'라고 했는데 그는 약속을 지켰다. 하룻밤을 보내면서 나에게 원고를 달라는 얘기를 단 한 마디도 안 했던 것이다. 다음날 서울로 간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그의 한 마디에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의 고백인즉 단 하룻밤이었지만 물소리 솔바람소리에 젖어 행복했다는 것이었다. 마음을 비우니 그 자리에 자연이 찾아오더라는 그의 말을 나는 지금도 신뢰하고 있다.

장마가 길어져 사랑방 아궁이에 물이 그치지 않는다. 어제도 작은 양수기를 이용하여 퍼냈지만 소용이 없다. 빗물이 아궁이에 스며들어 한 자씩 차곤 한다. 그래도 하루 동안 비가 멎은 뒤끝이라 수량이 많이 줄어들었다. 장작을 피울 만하다. 학생손님이 고슬고슬한 방바닥에서 뒹굴며 새소리와 개구리 울음소리를 들었으면 좋겠다. 요즘은 휘파람새와 소쩍새 소리는 잘 들리지 않고 꾀꼬리 소리와 검은등뻐꾸기 소리가 하루 종일 정겹다. 나는 학생과 이삼일 함께 보내면서 도덕적인 얘기는 하지 않으려고 한다. 모르긴 해도 학생은 가정과 학교로부터 '무엇을 하지 말라'는 강요 속에서 살아왔을 것이다. 나는 선의의 강요도 때로는 사람에게 독이 된다고 믿는다. 그 독을 치유하려면 스스로 무엇을 선택하고 직립 보행할 수 있게끔 방임하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도덕을 얘기하지 않는 대신 산방의 가족들을 많이 소개해줄 것이다. 산방 안주인은 나지만 바깥주인은 새들과 자연의 생명들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고 싶다.

바깥주인이라는 말은 내가 지은 것이 아니라 농부들의 일상어이다. 자두나무에 열린 자두를 안주인인 나는 몇 개밖에 먹지 못했다. 바깥주인인 까치와 어치들이 다 물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도 서로가 주인이니 억울해 하거나 분하게 여길 일이 아니다. 앵두는 맛도 보지 못했다. 다람쥐가 앵두나무 가지를 타고 다니면서 어찌나 맛있게 먹던지 차마 손이 가지 않았다. 새들은 어쩌다 날아와 따가지만 다람쥐는 아예 가지를 오르락내리락하면서 기득권을 주장하듯 먹어댔던 것이다. 매실은 시어서 그런지 새들에게 인기가 없는 것 같다. 노랗게 익어가다가 땅바닥에 떨어져 뒹굴고 있다. 그래도 술을 담겠다고 주워간 술꾼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마당가에 굴러다니는 떫은 감이야말로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소외계층이다. 그래서인지 그 옆을 지날 때마다 미안한 생각이 든다. 예전 어렵던 시절에는 떨어진 감도 뜨물에 우려먹었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말았다.
학생손님과 함께 아궁이에 쪼그리고 앉아 연기를 맡으며 감자도 구워먹고 싶다. 잉걸불에 구워지는 감자는 전자레인지에서 무표정하게 나오는 것과는 느낌이 다르다. 뜨거운 감자를 앞에 놓고 조금 식을 때까지 기다리면서 농부의 수고와 해와 바람의 고마움도 느끼게 될 것이다. 장작에 불이 붙었는지 굴뚝에서 연기가 춤을 추고 있다. 아궁이 바닥도 열을 받아 말라가고 있으리라. 저 정도 기세라면 또 장대비가 온다 해도 하루 이틀 동안은 달구어진 사랑방 구들장이 어머니 품처럼 편안한 휴식을 줄 것이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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